[기록보관소]
사서 김세은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지금, 가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곁에 와있네요. 지난 계절을 두고, 그 계절 속 나를 두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합니다. 누군가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했죠. 하지만 누군가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추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가을바람처럼 흘려보내는 건 어떨까요?
이번 10호 <가을의 시작>은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 설레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계절의 힘이 아닐까요? 박혜운 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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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의 열기가 식어가는 시기. 오전 6시, 감은 눈 속 은은히 번지는 빛에 아침이 평화롭다. 여름엔 잠 못 들게 하려는 듯 뜨겁던 공기가 가을엔 더 자도 된다며 다정히 속삭인다. 평화로운 공기가 계속해서 재우는 통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두 달 전 방학 계획을 써 내려갔던 때가 떠오른다.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필수 공부 목록을 적고 조금 빈둥댈 날들을 넣어 치밀한 두 달을 짰다. 그 계획 중 포기한 것들을 하나씩 짚어보다 세면대에 거품과 함께 물에 흘려버린다. 지금 후회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어 수도꼭지를 잠그고 생각을 털어낸다.
빵 한 쪽을 구워 우물대는데 거실 한쪽 구석에 고개 꺾인 선풍기가 보인다. 원래 저 위치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구석으로 밀려났다. 성큼 다가온 가을은 선풍기를 집구석으로 몰아내고 방학 끝난 대학생을 집 밖으로 쫓아낸다. 코드 뽑힌 기계의 신세가 처량하다. 기온 조금 내려갔다고 이렇게 매몰차게 굴 일인가. 나는 아직 쫓겨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오후가 임박한 시간에 일어나 첫 끼를 먹는 게 좋았고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하루가 좋았다. 외출은 큰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 챙이 긴 검은 모자면 충분했다. 창밖이 밝아질 때 즈음 눈을 감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잠을 잤다. 스트레스성 편두통을 달고 살던 나지만 방학 동안은 앓는 일이 없었다. 꾸준한 치료 덕이냐 환경 덕이냐 묻는다면 나는 후자의 덕이 더 크다 답하겠다.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수행해야 할 공부, 경험 따위의 일들을 어기는 나의 하루는 묘한 쾌감과 자유를 느끼게 해줬다. SNS에 올라오는 많은 소식 아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바쁜 사람들 속 내 게으름은 특별했다. 언제 또 이런 평화를 누리게 될지 모르니 마음껏 즐겼다. 그렇게 내 몸은 휴식의 열기로 가득한데 어느새 날은 식어버렸다. 오랜만에 먹는 아침밥에 속이 거북하다. 마지막 빵 한 입을 털어놓고 식탁 위 두통약을 집어 가방에 챙겼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생각하며 사는 하루는 피곤하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긴 머리를 잘라냈다. 하지만 가을에 떠밀린 나는 편한 옷들을 밀어내고 몸을 조여 불편한 옷들에 손을 뻗는다.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아직 멀었구나 싶다. 집 밖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고민거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밥은 언제 먹지, 같이 다니던 친구에게 연락을 넣어야 하나. 고민을 인식하니 오늘 하루를 가늠하게 되고 일어날 일들을 나열하다 손을 휘휘 젓는다. 마음을 바꿔 편한 옷을 집어 든다. 아직은 내게 남은 편안함과 여유를 잃고 싶지 않다. 바쁜 일상 속 갖은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그 스트레스가 낳은 두통의 끔찍함을 알고 휴식이 알려준 평안함을 안다. 고작 옷을 고르며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다니 한심한 일이다. 떨어진 시선 아래 쌓인 잡생각을 털어내고 가방을 둘러멘다.
몸에 남은 열기가 여름의 끝을 아쉽게 한다. 고요한 집은 떠나야 하는 이를 잡지 않는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 내 방학은 평가받을 것이다. 내가 포기했던 계획을 수행해낸 누군가의 얘기를 듣게 될 거다. 그 순간 나는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고요함에서 빠져나온다. 행복했으니 그만인 시간이었다. 충분히 즐겼으니 이만 집을 나서야 할 때다. 식지 않은 피부에 서늘한 공기가 스친다. 가을의 시작이다.
Vol.10 <가을의 시작> 中
Editor 박혜운
Photographer 김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