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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Aug 24. 2022

Vol.17<여백의 계절>

[기록보관소]


사서 김은지입니다.

모든 일과를 끝내고 침대에 누운 새벽, 제법 선선한 공기가 느껴져 선풍기를 끕니다. 돌돌 거리는 선풍기 소리 없는 적막한 여름의 끝자락. 곧 다가올 가을이 느껴집니다.

짧게 지나갈 것을 알기에 조금이나마 빨리 가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이 계절을 이르게 느껴볼 수 있는 포토에세이 <여백의 계절>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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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 다소 넓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늘 빼놓지 않는 것이 있다. ‘가을’.

불어오는 순간 이미 떠나고 있는 바람처럼, 머무를 새 없이 지나쳐가는 계절. 찰나만을 허락하고 금세 그 모습을 감추는 꼴은 분명 인색하지만 그럼에도 기다려지는 이름. 나는 가을이 좋다.

가을엔 산책이 제철


약속 시각보다 한참 일찍 집에서 나왔다. 산책이 제철인 가을을 맞이하여 어디든 좀 서성이기 위함이었다. 소지품은 작은 책, 지갑, 립스틱이 든 가방과 전화기뿐이다. 덕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데 오랜만에 걸친 긴 팔의 소매가 손등과 마음을 살짝살짝 스친다. 이 얼마나 넉넉한 기분인가.


나무늘보처럼 주변을 기웃거린다. 시간 여유도 있겠다, 과감히 처음 보는 길로 들어선다. 이번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보내리라 다짐해도 막상 닥치면 하는 건 늘 비슷하다. 느리게 걸어 평소라면 못 봤을 것을 발견하고, 같은 이유로 많은 걸 놓치며 보내는 일. 이미 걸어본 길이 많아졌으면 싶다가도 아직 닿지 않은 길이 존재하길 바라는 것 역시 가을에 자주 부리는 변덕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거닐다 보니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지하철을 놓쳐서 15분 정도 늦을 것 같아.” 평소 같았으면 미간을 찌푸렸을 법한 소식이다. 하지만 괜찮으니 천천히 오라고 답장했다. 이 계절이 조금이라도 더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는 내게 지금 이 기다림은 정말이지, 괜찮았기 때문이다. 가을은 그 찰나 같음 속에서도 무정하던 내 마음에 여백을 내어주고 가는 모양이다.

가을의 얼굴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잎이 슬그머니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발길을 멈추었다. 자연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사람들의 일상에는 어떤 풍경이 자리 잡았을지 궁금해졌다. 가까운 벤치에 궁둥이를 붙이고 낯선 이들의 산책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낙엽 하나를 주워 가방에 넣는 사람, 옥수수가 잔뜩 실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스웨터에 반바지를 챙겨 입은 사람, 움직이지 않고 버티는 반려견을 가만히 기다려주는 사람. 같은 계절 속 다른 이야기를 가진 얼굴들을 보며 콧구멍을 종종 벌름거렸다.


나의 얼굴에서는 무엇이 보일까. 그늘일까, 볕일까. 강일까, 바다일까. 의미 없는 공상을 하다 머리에 단풍잎이 붙은 것도 모른 채 뛰어가는 사람이 보여 괜히 내 뒤통수를 매만졌다. 이마저도 가을에 해봄직한 일이라 작게 웃었다.

침묵하는 계절


참새가 못 지나치는 방앗간처럼, 나를 반드시 머물게 하는 공간이 몇 군데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종합운동장역 9번 출구로 나와 아시아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에스컬레이터가 끝나갈 때 즈음 시야를 가득 채우는 나무는 몇 번을 봐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근처에 볼일이 있었던 오늘도 역시 공원 안으로 이끌리듯 들어갔다. 다른 곳에 비해 인적이 드문 편이라 사색을 즐기기도 좋으니, 고민도 많던 차에 잠시 멍이나 때리기로 했다.


약간 경사진 비탈길에 자리한 벤치에 앉았다. 귀뚜라미 울고 나뭇잎은 빛나는 오후 한 시의 태양 위로 파드득 날아가는 새가 보였다. 혼자였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속으로 삼켜야 했다. 쓸쓸하진 않았고 외려 다정한 침묵이었다. 짧아도 선명히 머물렀다 가는 이 계절을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더불어 내 안에서 일렁이던 것들도 알아채게 해주는 고마운 침묵이었다.


1년 후 여기 앉아 바라볼 나는 어떤 모습일까. 원하던 일은 시작했을까. 지금 좋아하던 것을 여전히 좋아할까. 삶의 태도가 조금은 변했을까. 만약 지금과 그대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요 속에서 물음표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 질문들을 품에 안고 조용한 카페로 향해 스스로와 길고 진득한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다. 선선한 날씨 속에서 야외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가만히 홀짝일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차오르는 마음.


아, 이번 가을에도 역시 길을 잃길 잘했다.



Vol.17 <여백의 계절> 中

Editor 최지희

Photographer 장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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