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대단히 불편하다고 느끼는 점이 하나 있다. 슬리퍼 신고 갈 만한 정육점이나 편의점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 때는 아파트 단지에 살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몇 걸음 안에 편의점이 있었고, 1분 안에 갈 수 있는 정육점, 슈퍼, 음식점들이 있어서 끼니를 해결하기에 너무나 편한 환경이었다. 요리를 하다가 두부 한 모가 필요하다거나 김치찌개에 넣을 돼지고기가 조금 모자랄 때도 후딱 다녀오면 됐었는데 말이다.
역시 그런 편리한 생활은 결핍이 되어봐야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미국에 오니 집에 갖춰진 재료가 없으면 그냥 포기해야 한다. 우리 집이 코스트코, 타겟, HEB 같은 큰 마트들과 꽤 가까운 편이긴 하지만 결국 차를 타고 10분 정도 운전해서 가야 한다. 게다가 한국처럼 작은 패키지로 재료를 사려 하면 가격이 너무 비싸고, 결국 대용량 벌크로 사야 그나마 합리적인 가격이 된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하나둘 생기고 있다.
고기 손질이 가장 큰 일
우선 고기는 코스트코에서 산다. 삼겹살 없이 못 사는 한국인인지라 삼겹살이 붙어 있는 부위를 통으로 사서 구이용, 수육용, 찌개용 등 목적에 맞게 먹을 만큼씩 소분해 둔다. 어느 정도 힘이 필요한 일이라 이건 남편이 담당하고 있다. 다행히 남편이 이런 일을 나름 재미있어 하는 편이라 천만다행이다. 볶음밥이나 햄버거 패티, 동그랑땡 같은 반찬을 만들 때 유용한 다진 쇠고기는 2파운드 정도 사면 2~3주 먹을 만큼이 된다. 보통 살코기와 지방 비율(Lean : Fat)이 8:2 정도 되는 것을 사서 먹을 만한 양으로 소분해 둔다.
엄마의 일상은 프렙(Prep)
매일 쓰는 재료는 미리 소분해 두면 훨씬 편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도시락을 먹다 보니 매일 쓰는 재료가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 버터, 스팸, 베이컨, 양파, 대파 정도다. 버터는 한 번 먹을 정도로 잘라 통에 얼기설기 넣어 냉동실에 보관하면 아침에 하나씩 떼어 쓰기 좋다. 버터도 코스트코에서 대용량으로 사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삼각김밥, 볶음밥, 유부초밥, 김밥을 주로 싸가는 우리 아이들의 런치를 위해 아침마다 칼질을 하는 건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그래서 이 재료들은 전날 저녁에 미리 손질해 둔다. 소분하지 않고 매번 원재료를 썰고 볶고 도시락통에 싸는 일을 일주일 정도 해 보니, 확실히 프로세스를 줄여야 아침이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마트에 가보니 알게된 사실, 미국 엄마들의 이런 번거로운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프렙(Prep; 손질된 재료)을 팔고 있다. 너무 바쁘면 냉동피자를 데워서 보내기도 한다는데, 아직 때가 덜 묻은 한국엄마로서 매일 따뜻한 밥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다.
우리집 팬트리는 편의점
편의점에서 급하게 사 먹던 간식들은 이제 우리 집 팬트리로 들어왔다. 미국 전역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신기하게도 스낵타임이 있다. 학교에서 시리얼이나 요거트 같은 아침을 제공하기도 하고, 수업 중에도 간단한 스낵을 먹는 것이 허용된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감자칩, 그래놀라바, 견과류, 과일, 크래커, 쿠키 등 생각보다 다양한 스낵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 팬트리에는 학교에 가져갈 스낵이 떨어지지 않도록 소포장 간식들을 늘 쟁여 둔다. 저렇게 많아 보이는 간식도 며칠이면 사라진다는 무서운 사실.
생각보다 유용한 "냉장고 속 사정" 메뉴판
냉장고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하는 ‘셀프 AI 메뉴판’도 만들어 보았다. CES에서 봤던 것 같은데, 요즘 냉장고 안에 어떤 재료가 있는지 파악해서 메뉴를 추천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때는 기발하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겼는데, 어떤 유튜버가 직접 손으로 적어서 냉장고 재료 관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해 보았다.
생각보다 꽤 쓸 만하다. 사 놓은 재료들을 까먹는 경우가 많은데, 냉장고 용량이 크지 않다 보니 빨리 소진해야 할 재료와 빨리 채워야 할 재료를 한눈에 보는 것이 필요했다. 이 메뉴판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새로 쓰고, 추가되는 재료는 볼펜으로 적고, 소진되는 재료는 줄을 그어 표시한다. 눈으로 재료를 보면서 어떤 메뉴를 만들 수 있을지 상상하다 보면 매일 “오늘 뭐 먹지?” 고민하는 시간이 조금 줄어든다.
살림에 자신 없는 13년 차 주부지만 미국에 와서야 뭔가 제대로 살림을 배우는 느낌이 든다. 일한다는 이유로, 혹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는 편한 환경에 있다 보니 살림은 항상 뒷전이었다. 그런데 이제 미국 생활에 익숙해져야 하니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나름의 라이프 해킹을 하고 있다. 살림이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매일이 보이니 이것도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