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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15. 2020

우리집 가훈은 이걸로 정했다







'여보, 잔소리 좀 그만해. 나도 노력하고 있잖아'




얼마 전 남편이 궁서체 같은 얼굴로 말했다. 좀처럼 싫은 소리 할 줄 모르는 이 남자가 진지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는 건 스트레스가 임계치를 넘었다는 의미.


잔소리가 좀 심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게 어떻게 잔소리일 수 있나, 억울했다. (세상 사람들 내 말 좀 들어보소)





내가 요구한 건 다음과 같았다.


다 마신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차 안에 두지 말고 바로바로 버려줄 것 (보통 3-4개씩 쌓여있다), 음식 찌꺼기가 묻은 앞치마 또한 차에 두지 말고 집으로 가져와 바로 세탁할 것 (그는 요리사다) 변기에 묻은 소변은 바로 바로 닦을 것 (변기를 올려도 소용없다! 냄새가 난단 말이다) 신발 정리를 할 것 (신발도 몇 켤레 없는데..) 운동복이나 수건을 의자 곳곳에 걸어놓지 않을 것, 평상복과 잠옷도 걸어놓을 것 (옷걸이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야) 수건은 동시에 여러 개 쓰지 말고 하나만 쓸 것, 쉬는 날에는 1회 청소기를 돌릴 것, 스토브 환풍기를 사용 후 전등을 끌 것.......




많이 쏟아낸 것 같기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도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것이 스트레스였다..고 변명해 본다.


아무튼 남편은 잔소리의 내용보다 방법이 기분이 상했다고 했다. 훈계와 비난조였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았다. 나는 불만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여과없이 바로 뱉어내는 성격이었고, 남편은 심각한 사안이 아니면 불만이 있어도 참고 한 걸음 물러나는 성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서로 융통성 있게 역할 분담을 하고 싶어하는 스타일이었고 남편은 정해진 매뉴얼대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걸 편안해하는 스타일이었다.




서로 다른 두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정기적으로 한번씩 겪는 자연스러운 갈등이랄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전처럼 '앞으로 잘해보자 화이팅' 유야무야 화해하기보다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에이포 용지를 펼쳐서 하우스 룰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반으로 접어 왼쪽에는 각자가 지켜야 할 기본 룰을 적었다. 내가 지켜야 할 항목은 '잔소리 금지' 였다. 감정적이거나 짜증 섞인 말을 뱉기보다 차라리 패널티를 부과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패널티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남편이 쉬는 날 해야 할 집안일의 목록을 적었다. 남편은 매우 기뻐했다. 이제 쉬는 날 눈 떠서 뭘 해야 하는지 내 눈치 보지 않고, 써 있는 것만 얼른 하고 편하게 쉴 수 있으니 좋다면서..... 아무튼 이렇게 기본적인 걸 굳이 써야 하나 싶었지만 효과는 놀라웠다.




그는 마침내 의자가 아닌 옷걸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감격) 신발도 가지런히 정리했고 차 안에 쓰레기를 두지 않았으며 변기도 깨끗이 사용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아침 저녁으로 냉장고에 붙은 하우스룰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읽으면서 '투 두 리스트'를 체크했다. 오늘은 규칙을 다 지켰다며 뿌듯해하기까지 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사탕이라도 줘야 하나...에효) 

내게도 변화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는 남편의 편안함 때문에 아무말이나 툭툭 던지곤 했는데 한번 생각하면서 말을 내뱉게 됐고 하루 끝에서 혹시 내가 기분 상하게 한 말은 없었는지 묻게 됐다. (물론 있어도 있다고 대답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걸 감안해서 더 조심하려고 한다.) 





 머리를 맞대고 손글씨로 하우스룰을 적는 아이디어는 식단을 짜면서 얻었다. 요리를 싫어하는 내게, 매일의 식사 메뉴를 정하고 일주일에 두어번 장보는 일은 큰 부담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편과 식탁에 나란히 앉아 일주일 식단을 미리 짰다.


남편이 쉬는 날 같이 마트에 가서 한 주 먹을 음식의 재료를 미리 사다 두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정해진 식단이 있으니 장을 보는 시간도 크게 단축됐다. 요리하는 일도 이전만큼 귀찮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나도 모르는 새 식단에 적힌 메뉴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 주 끝에 남편과 '와, 이번주는 계획한 그대로 다 먹었네' 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계획한 대로 약속한 대로 이뤄지는 것, 머릿 속에 있는 생각을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 그게 바로 기록의 힘이었다.




 불현듯 나는 2020년 1월에 쓴 일기를 들춰보았다. 거기에는 전자책 만들기, 글 연재하기, 온라인 글쓰기 강의 진행하기, 독서모임 시작하기, 유튜브/인스타그램 팔로워 늘리기, 나를 홍보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등의 구체적인 목표와 세부적인 실천 사항이 적혀있었고, 10월 현재 대부분이 실행되고 있었다. (소오름)  



최근에는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노트를 한 권 마련했다. 매일 글을 쓰기 위한 해빗 트래커를 만들고 향후 어떤 내용의 글을 몇 편 더 적어내려갈 것인지, 어떤 키워드와 컨셉을 가지고 책을 완성할 것인지 각종 아이디어를 적었다. 비록 수상작으로 선정되지 못한다고 해도 이 노트는 책 한 권의 기획 과정이 담긴 나만의 자산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쓰면 된다! 이것을 종교처럼 믿게 되어서다. 남편이 옷걸이에 옷을 거는 일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므로 어떤 면에서는 종교보다 더 신뢰하게 됐다.


누군가와 갈등이 생겼을 때,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을 때 우리 마음은 항상 초조하고 답답하다. 그럴 때 백지를 펴놓고 뭔가를 쓰면 문제는 금방 해결되고 꿈에 한 발 다가가게 된다. 정말 멋진 일이 아닌가.


여러분도, 나도 쓰면 된다!

우리집 가훈이지만 마음껏 가져다 쓰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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