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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29. 2020

널 존경해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Y가 내게 ‘널 존경해’ 라고 했다. 널 존중하는 걸 넘어서 존경한다고. 그 말에 감동받은 나는 우리를 둘러싼 몇 초간의 침묵을 누리다가 사랑은 누군가를 존경하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Y와 만난 지는 올해로 십년 쯤 되었고 원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힘들었던 순간마다 서로가 항상 곁에 있었고, 어려운 고비를 각자가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누군가 사는 모습을 옆에서 빠짐없이 지켜보게 되면 그 사람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마라톤 선수의 달리기가 빠르든, 느리든 상관없이 포기하지 않고 뛰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를 응원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삶을 유지하려는 생명의 힘, ‘살아있다’는 존재의 상태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존경받을 가치가 있었다. 





 ‘널 존경해’라는 Y의 말은 한동안 내 귓가를 맴돌았다. ‘존경’이라는 화두를 받은 것 같았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사랑이 아닌 존경으로 맺어지면 어떨까 생각했다. 자식만 부모의 은혜와 희생에 존경을 표하는 게 아니라 부모도 자식을 존경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아이가 태어난 순간 느끼는 경이만으로도 그 생명을 평생 존경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아이를 존경한다면 감히 그의 삶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미 할 일을 다 했고 부모를 위해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공부를 잘해야 할 이유도, 좋은 대학과 회사에 들어가야 할 이유도, 돈을 많이 벌어서 효도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내가 존경하는 대상이 건강하고 기쁘게 생을 살아가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어버이의 날’처럼 ‘자녀들의 날’을 만들면 어떨까) 직장 상사와 후배간의 관계도 상대방의 전문지식이나 노동 자체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일의 능률면에서도 훨씬 이득일 것 같다. 굳이 능력의 수준과 성과를 따지지 않아도 신체와 정신을 이용해 일을 해서 밥벌이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백팔대참회문>은 한 배할 때마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데 그전에 ‘지심귀명례’라는 말을 붙인다. 우리말 해석본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절 하옵니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처음 이 구절을 봤을 때는 목숨까지 바칠 마음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절을 하다 보니 ‘목숨’이라는 게 뭘까 자연스레 생각해보게 됐다. 사전을 찾아보니 목숨이란 ‘숨을 쉬며 살아있는 힘’이라고 나와 있었다. 올해 들어본 말 중에 가장 멋진 말이었다. 목숨이 살아있는 힘이라면 ‘목숨 바쳐 절 하옵니다’는 내가 가진 온 힘을 끌어 모아,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절을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절을 하는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목숨’들이었다.      




  사전적 의미를 알고 나니 백팔 배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존경을 표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로서가 아니라 그 살아있는 힘을 느껴보자면 식탁 위의 아레카 야자의 목숨, 내 옆에서 백팔 배를 하는 Y의 목숨은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Y도 그것을 어렴풋이 느꼈을지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뜬금없이 내게 존경한다는 고백을 할 연유가 없었다. 조건 없는 사랑, 존재자체만으로도 사랑하라는 말도 좋지만 그보다 ‘존경’이라는 말이 이제는 훨씬 와 닿는다. 모든 사람을 ‘부처’로 보라는 어느 경전의 한 구절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간다.      




 Y를 향해 ‘나도 당신을 존경해’라고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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