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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29. 2020

리액션 천재

 핑크 싱고니움이 살짝 시들어가는 기미가 보여 밖에 내 놓았다. 지난 4월에 작은 모종을 사서 잎을 서너 개 틔우기는 했지만 눈에 보일만큼의 폭풍 성장은 없었다. 종이컵 화분과 오래된 흙이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인가 싶어 플라스틱 화분에 새 흙을 담아 옮겨 심어주었다. 아침부터 보슬보슬한 흙을 만지니 기분이 좋았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래 장난, 흙장난을 하며 놀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신체 활동에 깊게 몰입할 때 행복하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어른들처럼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고찰하지 않아도, 사회과학적으로 개념을 정의하고 분석해본 적 없는데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신비로운 일이다. 


 작년 봄, 한국에서 4박 5일 서호주 여행을 온 가족이 있었다. 세 살, 다섯 살 두 아이에게 호주의 광활한 대지와 자연을 보여주고 싶었던 부부는 불과 사흘 동안 장장 2,000km에 달하는 여행 코스를 신청했다. 한국의 바쁜 일정을 쪼개어 낸 휴가인데다 장거리 비행에 지치셨을 텐데, 아이들을 위해 쉴 틈 없이 긴 여정의 고단함을 감수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처음 퍼스에 오면 가볼만 한 대부분의 서호주 관광지에 발도장을 찍었는데, 그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다름 아닌 놀이터에서 본 나뭇가지와 개미였다. 


다른 곳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힘들다며 칭얼거리던 아이들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던지며 전에 없이 깔깔댔다. 작은 개미들이 무리 지어 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신기했는지 세 살 남자아이는 눈을 떼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개미들을 가리켰다. 나는 그것이 개미라고 알려주었더니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 해서 서둘러야 했는데 아이들은 그 놀이터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돈 들여 먼 곳까지 데려왔더니 한국에서도 흔한 놀이터를 좋아하냐고 허탈해하던 남자 분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어른들도 돌이나 낙엽, 개울이나 작은 곤충을 보고 흥분할 수 있다면 굳이 해외여행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나는 더 큰 자극을 끝없이 욕망하는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노르웨이도 가고 아이슬란드에도 언젠가 갈 거지만... 아무튼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안에 이미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지혜가 있지만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마음의 어두운 장막만 한 꺼풀 걷어내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감은 눈을 번쩍 뜨듯이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어려워 절절매는지 모르겠다.     


      




 

“패런스는 ‘엄마에게 화가 난 아이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던지고는 합니다’ 라고 덧붙였다. 직접 부모에게 대드는 아이도 있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더욱 약한 사람을 찾아 화를 낸다. 그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전략이라는 사실을 태어날 때부터 아는 것이다”      <감정 폭력> 



 오늘 오후 <감정 폭력>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이의 마음에는 행복을 감지하는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알아보는 타고난 교활함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이 책은 어린 연령부터 광범위한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신체적 학대에 비해 눈에 잘 띄지 않아 과소평가 되고 있는 감정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성희롱을 비롯해 가정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조롱과 모욕, 정서적 학대, 따돌림이 대표적인 예다. 저자는 감정 폭력의 피해 양상과 가해자의 특징, 그리고 그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도 제시하고 있다. 가해자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기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L.C.L (Love It, Change It, Leave It : 사랑해보고 바꿔보고 아니면 떠나라) 전략을 알려주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계도 있어보였다. 정서적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의 특징과 성향을 분명하게 묘사한 부분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감정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인지하기 어려워서, 다혈질인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스스로의 예민함을 탓하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또라이 감별법‘이 될 듯 했다. 한편, 매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도 자기중심적인 해석이며, 실제로 감정폭력의 가해자들은 자신을 피해자라고 여긴다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화가 났지만, 살면서 나 또한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돌이켜 보면 L.C.L 전략을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생각, 그러니까 할 만큼 다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었기에 사랑해보려고 했고, 그의 조롱과 짜증에 능청과 무관심로 대응하며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시도도 했다. 참다못해 ’당신과 있으면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어요‘ 라고 고백도 했다. 만일 그가 ’내가 너한테 그만한 이야기도 못하냐‘고 따지는 대신 힘든 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사과 한 마디 해주었다면 떠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배려와 애정 어린 말 한마디, 그거 하나면 국제 학회까지 열면서 감정 폭력을 연구할 필요는 없을 텐데. 모두가 타인의 마음 들여다 볼 겨를 없이, 내 마음만 봐달라고 떼쓰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에는 돈을 내고 내 말을 들어줄 상담가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      





 


남편은 수다쟁이다. 말을 워낙 재미있게 하는 유쾌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끔 같은 말을 반복해서 지겨울 때도 있다. 예의 없다는 걸 알지만, 그의 가족사나 대학 시절 이야기를 친척 이야기를 듣고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온다.       


이제부터 옛날 이야기할 때는 돈 내고 해.      


 얼마 전 남편은 젊은 사람에게 조언을 하면서 일명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돈 내고 얘기하면 될 거라고 주장 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한다는 핑계로 잔소리를 하다가, 성실하고 찬란했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으스대고 싶을 경우에는 웃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요즘처럼 모두가 자기 말만 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준다는 것은 전문적인 테크닉을 요하기 때문이란다. 남편의 그 말이 문득 떠올라, 했던 이야기 또 할 때는 돈을 내라고 장난삼아 이야기 했는데, 그가 ‘오케이’ 대답하며 내게 10달러를 건넸다. 리액션의 천재 같았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돈을 받았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짜증나지 않고 이야기가 쏙쏙 잘 들어왔다. 오히려 새롭게 들렸다.      



- 오빠, 나 지금 나한테 너무 실망했어. 돈을 받으니까 사람 맘이 이렇게 달라지네. 

  오빠 얘기 더 듣고 싶다..... 


- 10달러 내면 30분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아직 20분 남았어.        



 나는 세상 애정 어린 심리 상담가로 돌변해 남편의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어주었다. 10달러를 잘 가지고 있다가 나도 남편이 지겨워할 만한 이야기를 할 때 지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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