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서 부모가 되는 기회가 주어진 것도 서로의역할을 바꾸어 살아 본 후에야 이해의 폭을 넓혀 보라는 것일 텐데.
나는 자식 노릇만 하다가 철없이 늙어 가겠지만.
요즘, 내가 엄마에게 안달복달하던 중에 마치 부모 된 입장을 체험해 볼 기회가 왔다.
나와 엄마는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이 오십 년 넘게 살아왔다.
기쁨도 슬픔도 제일 먼저 함께했고, 모든 것을 나누는 사이였다. 때론 성가시고, 구질구질했고, 그러다 세상에 둘도 없이 애틋해 지곤 했다.
엄마는 나를 낙태하려다 실패해서 어쩔 수 없이 낳았다. 내가 허약하게 태어난 것이 당신 탓으로 여겼고, 죄책감을 가졌다. 평생 나를 과보호했다. 내가 안정권에 들어야 안심했다. 나는 지긋지긋해하며 은근히 그 '덕'을 누렸다.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연대가 엄마와 딸, 딸과 딸 사이라고 한다.
나와 엄마 관계는 일종의 생명 채무관계? 연대기가 아닐까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나 중심에서 엄마 위주로 바뀌었다. 나를 당신의 보호자로 여겼다. 섭섭함도 증폭되었다. 질기게 우려먹던 '생명 채무관계'도 파기됐다.
엄마로만 알던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참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짝 잃은 허전한 심정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이전보다 감정적, 신체적 소모 같은 것에서 해방되어서 여우로워 져서일까.
엄마는 시간 개념이 사라졌고, 외출도 잦아졌다.
경로당과 가끔 산악회만 다니던 엄마는 노래교실 같은, 흥을 돋우는 취미활동을 추가하며, 연하의 지인들과 어울려 다녔다. 지인들은 70대에서 80대 초였다. 엄마 또래는 없었다.
아흔이 넘어면서 나 혼자되었다. 힘들고 고독했다. 김형석 <백 년의 지혜> 본문 중에서
김형석 교수님은 노년에 가장 힘든 것을 외로움으로 꼽았다.
배우자와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낸 뒤. 자녀들이 채워 줄 수 없는 외로움 일 것이다.
엄마 역시 그 외로움을 잊어보려고 사람 가리지 않고 어울렸다. 무척 감사한 일이다.
문제는 모든 식사비를 쏜다던지, 고령의 지인이 운전하는 차에 동승하여 고속도로를 탄다는 것이다.
"그 먼 곳엔 왜 갔는데, 차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내 잔소리가 길어지면, 엄마는 서러운 아이 같이 불평이 쏟아진다.
"너희 아버지도 내가 노는 것 갖고 잔소리하지 않았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말들이다. 엄마도 그걸 잘 안다.
엄마가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진 않다. 관절염 없는 두 다리로 하루 만보는 거뜬히 걸으며, 지인들과 어울려 다녔다. 활력과 에너지를 얻었다. 그게 노환을 늦추는 비법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90을 바라보는 노인이 내일은 없다는 듯, 노는 걸 너무 좋아한다는 것.
너무 놀다가 기진맥진해지길 반복하더니.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갔다.
놀다가 실신해서 응급실에 실려 온 게. 너무 황당하고, 황망했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잘 못 될까 봐 불안한 가운데 낯설지 않은 두려움까지 밀려왔다.
3년 전 아버지가 실려 왔던 그 응급실이었다. 두 번 다시 접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었다.
다행히 엄마는 심전도, 피검사 등에서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젊은 의사들이 떠난 자리에 나이 지긋한, 응급의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최근에 스트레스받은 일 있어요?"
"그런 건 없는데...."
엄마가 힘없이 대답하면서, 온몸이 조여들 듯 숨이 콱 막히는 건 무슨 이유냐고 의사에게 물었다. 켕기는 그 이유가 아니길 바라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나는 속으로 실소했다.
의사는 한참을 엄마 안색을 살펴봤다. 특히 눈동자 움직임을 주시했다.
잠시 뒤, 소견을 말했다.
"혈압 문제인 것 같은데. 나이가 들어 감정 조절이 안 되면 큰 위험이 되고, 지나치게 기쁜 것도 몸에 해로워요. 노인이 되면 감각이 둔해지는 것도 감정을 보호해 주려는 거니까요."
희로애락을 너무 극단으로 가지면 혈압에 무리를 줘서 위험하다는 거다. 고령의 노인이 너무 기뻐서도 안 좋다는 건 처음 알았다.
노인 의사가 노인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간파했다.
수액을 다 맞으면 가도 좋다고 해서 내가 수납하러 가 있는 동안, 엄마는 언니들에게 당신이 응급실 온 비보를 전했다.
두 언니들은 성격 급한 순서대로 내게전화 왔다.
"넌 엄마를 어찌 모셨기에 응급실에 실려 오게 했냐."
"늙은 엄마 밥 시켜 먹지 말고, 영양식도 좀 해드려라."
전후 사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야단 법석이다. 다들 내 탓으로 몰아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히잉.
과하게 놀아서 실신했다고 어찌 말해.
나는 아버지 일을 겪으며, 병간호가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를 요양병원에는 절대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엄마 건강을 우선으로 챙겨야 하는 것도 당연히 내 몫으로 여겼다.
나는 없는 시간 내서,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외식과 쇼핑을 한다. 한 끼 식사는 내 손으로 해드리고 있다. 나름 장족의 발전이지만, 당연한 걸 가지고... 말하긴 좀 우습다.
이때껏 몰랐던 엄마에 대해 이런 식으로 또 알아 간다.
노는 것에 진심인 엄마.
분명 그렇게 된 배경이 있을 것이다.
부모의 삶을 알지 못하면 내 삶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엄마의 어린 시절, 성장 배경에 대해 묻고, 귀 기울어 보기로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분에 대해 모르는 게 참 많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는 것에 진심인, 노(no) 노(老) 족 엄마에 대해 간단 소개.
엄마는 1937년, 수입품 잡화점을 하는 상인의 1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외조부 덕에 먹고사는 데는 별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한다. 호의호식하며 컸지만, 외조부는 여자 배워봐야 시건방만 는다고 다니던 국민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외조부는 누가 봐도 오금이 저릴 만큼, 차갑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찍소리도 못하고 살았다. 엄마는 공부 못한 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그 뒤, 취직을 하거나, 집안 가사를 돕고 배우지 않았다. 엄마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순진하고 어리숙한 사람으로 컸다.
엄마는 경제적으로는 중상위권에 속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문맹에 가까운 하위권인 사람으로 인생 이력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엄마의 처녀 시절은 가끔 친구들과 영화나 보러 다니고 맛있는 것 사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 친구의 꼬드김에 사교춤을 알게 되었다. 용돈을 받으면, 모아뒀다가 몰래 춤을 배우러 다녔다고 한다.
부녀자의 사교춤문화가 합법적이지 않던 시대였다. 엄마의 유일한 일탈이었다. 도시의 감미(甘味)였을 것이다.
외조부의 남존여비 교육관이, 엄마가 시근방스러운, 노는 가닥 같은 소양으로 자리 잡히는 데, 일조한 셈이었다.
잠재된 끼를 은밀히 풀어내던 것도 엄마가 26세가 되자, 노처녀 대열에 들어섰다고 여긴 외조부가 강제로 결혼시키면서 끝나 버렸다.
엄마는 그 시대 여자들이 그랬듯, 결혼과 동시에 춤 따윈 잊고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90대를 앞두고 해방기를 맞았다.
느지막이 눌러 두었던 은밀한 취향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생각해 보니, 그 시대를 살아온, 이 땅의 어머니들이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제 속에 잠재된 재능을 발견하고 능력을 키울 기회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평생 모르다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전쟁, 가난, 질병, 문맹, 성차별 등 이 중 한 가지라도 피할 순 없었을 것이다. 나이 80, 90대까지 살아낸 것만으로 귀하다.
엄마도 그런 세월을 보냈다. 국민학교를 중퇴한 그 시점에서 지능적, 학습적, 사고력이 멈추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