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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yu Jul 23. 2024

 그때 알았다면


많은 부모들이 자신이 이루어내지 못한 것을 자녀가 대신 이루어내도록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투사(projection)라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 사람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다.

정여울 <상처조차 아름다운 당신에게>  본문 중에서






좋은 것 나쁜 것 없이,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손익 계산 따지지 않고 쓰고 베풀고 사는 엄마.

가장 활약상이 두드러지는 곳은 매일 발도장 찍는 경로당이다.

엄마는 그곳에서 작은 임원 한 자리를 맡고 있다.

엄마가 머리털 나고 처음 해봤을 감투라서 인지, 몸 사리지 않고 궂은일 도맡아 하고, 물량 조공까지 아끼지 않고 있다.

내가 보기에 엄마는 이용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 지면에 다 쓸 수 없을 만큼, 해도 해도 너무한 곳이었다. 노인 사회가 고적하니 힘없이 늙어 가는 풍경만 그려지는 건 아니었다.

진심으로 엄마로부터 1호로 차단시키고 싶은 곳이다.

웃기게도 내가 하는 짓이 투사(projection)란 것이었다.


그런 내 모습에서 지난날 엄마가 내게 했던 모습이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덕'과 '탓'이 된 내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30여 년 전, 내가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도자기공예를 전공하다가 힘에 부쳐서 중도에 그만두고, 도자기와 결이 비슷한 지점토를 배웠다. 사범과정을 마치고 학원에 취직했다.

지점토 사범, 초창기 멤버라서 전도유망한 편이었다. 

'O 공예학원'은 그 지역에서는 생활공예 분야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고, 최다의 수강생을 보유한 학원이었다.

얼마 전에 종방 된 '졸업'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내가 근무했던 O 공예학원이 떠올랐다.

가르치는 분야가 전혀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 대치동 학원가의 생태계와 비슷했다.

경쟁학원이 우후죽순으로 무수히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지기도 했고, 학원들 간 과열경쟁이 심했다.

그러나, 선점 깃발을 꽂고 선봉대에 있는 O 공예학원을 이겨 먹을 순 없었다.

그 당시, 한시적이고 기형적인 현상이었다.


 O 공예학원은 상가, 중권가, 백화점, 호텔등이 밀집한 번화가에 위치해 있어서 번창할 수 있었고, 수강생 모집 전문 인력을 따로 두었던 것이 더 적효했다.

그 일대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뿐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까지 수강생을 끌어왔다.

적지 않은 커미션을 챙겨 갔지만, 학원 측에서 아깝지 않을 만큼 대단한 영업력이었다.  

시류, 유행의 흐름에도 한 몫했다.

지점토 및 신생 생활공예는 신부 수업의 필수 코스가 되거나, 고수익을 보장하는 여성 취미로 급상승했다.

그 당시 성행했던 공예 대부분이 선진 문화의 부산물이었다. 오리지널 국가에서는 장인 정신으로 평생 업으로 삼던 공예 분야였다. 국내에만 들어오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수명도 짧았다.

나 또한, 수익성이 있고, 유행, 선호도, 트렌드에 맞추어 다양한 공예들을 섭렵해 왔다.

수 십 종류의 공예를 접해 봤고, 30년 그 방면에서 일해 왔다.

공예의 길을 처음으로 열어준 지점토가 가장 기억에 오래 남고 열정을 쏟아부었던 시간이었다.   


O 공예학원은 명성답게 개강하면, 평균 수 백 명 이상 신규 수강생이 밀려들었다. 그 외에도 출강 건 수가 쇄도했다. 대학교. 방송국, 기업체 등은 원장님의 문어발 인맥이 모두 닿아 있었다.

대부분의 상업 아트 분야가 그렇듯, 재능만으로 성공하긴 힘들다. 본인의 물량, 인지도, 인맥 등이  베이스에 깔려있어야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발을 들여선 안 될 토양이었다.


원장님은 드라마 '졸업'에 나오는 최형선 원장과 성향이 비슷했다.

중년 여자로 속내를 알 수 없는 인상 뒤에는 야심이 무척 대단했다. 대형 공예학원과 지부 몇 개를 가진 경영자로 만족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권까지 공예 지부를 키우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원정대에 나를 1호로 넣어 주겠다는 꿈을 심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희망 고문에 가까웠다.


원장님이 내게 씌운, 프레임은 성실하고, 양심이 보드라운, 충직한 수하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원장님의 공백을 메꾸는 수강뿐 아니라 출강인데, 원장의 보조로서 본분과 선을 잘 지켜야 했다. 그리고, 주요 수입원인 재료비 내역을 꼼꼼히 기록하는 것이다.  

그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욕심 없고, 양심적이어야 했다.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원장님이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심약하고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원장님이 나를 발탁한 가장 큰 이유였다.  

나의 30년 넘는 공예 인생에서 O 학원에서의 5년이 가장 드라마틱했다. 인생의 변곡점과 활승, 활강점을 온몸으로 찍어냈다.   

내 저질 체력이 방전되도록, 바닥까지 박박 긁어 쓰던 일상이었지만, 의지력 박약인 내가 끈덕지게 한 가지 일을 길게 할 수 있게 이끌어 준 분.

거장이 이끄는 공예호에 승선하여 미지의 거대한 대해를 개척하는 꿈을 맛보게 해 준 원장님이었다.


한편으로, 원장님은 내게 오미자 같은 사람이었다.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맛이 있는 줄로만 알지, 어떤 맛도 진심으로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성공하고 싶은 욕망 같은, 당류를 첨가해야 먹을 만했다. 선의든 착취든 뭐든 용인되었다.


이제 기억에서 대부분 잊혔지만, 또렷이 남는 사건이 몇 있는데, 엄마와 관련된 일이다.

원장님이 급하게 일이 생겨, 중요한 출강을 내게 맡겼다.

나는 하필 출강 당일,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도저히 지방까지 출강을 갈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업체 대표 번호로 일정을 미루겠다는 연락을 돌렸다. 담당자와 직접 통화하지 못했다. 삐삐 (1996년에 생김), 휴대폰(상용화되지 않음)도 없던 92년이었다.


며칠 뒤, 학원에 출근했는데, 나를 대하는 부원장과 총무의 표정이 살벌했다.

출강을 제 멋대로 펑크 냈다는 것이다. 업체 담당자에게 내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듯했다.

부원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비웃으며 말했다.

" K 선생은 일반 직장에 다니긴 힘들겠어."

"네? 그게 무슨...."

내 물음에 대답을 잠시 망설이더니, 원장님한테 들어라고 했다. 그리곤 계속 비아냥 거렸다.

"여기 입이 몇 갠데, 드링크제 한 통이 뭐야." 했다.

평소에도 원장 라인 부원장 라인 편이 갈려 있어서 나와는 특히 사이가 안 좋았다. 나는 부원장의 말은 흘러들었다.

엄마가 나 모르게 학원에 다녀갔다는 것, 딸이 다니는 직장에 처음 방문하면서, 씀씀이가 큰, 엄마답지 않게 달랑 음료수 한 통만 사들고 갔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부원장이 비웃었던 게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너무 부끄러웠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엄마에게 분노로 쏟아냈던 것 같다. 엄마가 왜 학원에 왔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5년이 지난 후, 그 학원에서 나오게 되었다. 동료였던, J와 학원을 공동 창업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원장님은 내게 무척 섭섭함과 배신감을 내 비쳤다.

나도 원장님이 지점으로 낸 2호 학원은 내게 맡길 줄 알았는데, 나를 배제시킨 것 솔직히 기분 나빴다고 털어놓았다.

"K 선생은 여기 본 학원을 맡아야지. 내가 다 생각해 둔 것도 있고...."

원장님은 내가 떠난다고 하니까, 거하게 공수표를 날려 주셨다. 나는 이미 원장님에게서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그럴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전시회에 출품한 내 작품의 판매를 막았고, 내 성과를 무효로 만들었다. 그때 나는 이 사람 밑에 계속 있다간 성장을 할 수 없겠구나 싶었다.  

엄마가 학원을 다녀 간 날을 기점으로 나갈 궁리만 했다.


원장님은 나보다 몇 수 위였다. 절묘한 타이밍에 엄마가 학원에 찾아와서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내 딸, 지방 출장은 절대 혼자 보내지 마라. 지난번에도 늦은 시각에 위험한 총알택시를 잡아 타고 집에 왔다. 앞으로 초과 근무도 안된다.'라고 했다는데....

부원장이 내게 일반 직장은 못 다닐 거리고 했던 말이 이런 뜻이었다.


원장님은 그 무수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엄마가 했던 말을 내게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원장님이 받았을 모욕감은 가히 상상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내색하지 않았던 것도 있겠지만, 내 쓸모가 아직 유효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 무서운 사람이었다. 무서운데, 고마웠다.

 

만약 그때 알았다면, 엄마와 절연했을 각이었다. 

그리고 내 공예 인생은 짧은 생애로 마감했거나. 약점 잡혀서 원장님의 수족으로 남았을 테지.


나에 대한 염려로 과잉 보호 했던 엄마, 당신이 했던 투사(projection),

내게 중요했던 일과 관계성에 개입해서 차단하고 끊어 버리겠다는 투사(Firewalk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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