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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yu Jul 30. 2024

부케와 부캐


신부 부케를 받고 6개월 안에 결혼하지 않으면, 3년 안에 결혼을 못한다는 저주 같은 속설이 있다.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며 신부 부케를 수없이 받았다. 내가 손수 만들어 갔던 부케도 다시 들고 왔다.

3년이 아닌 30년의 저주 마일리지를 넉넉히 쌓았다.

꽃다발 부케를 너무 많이 받아서, 웨딩 리그에서는 서브 캐릭터, 부캐로 살아왔다.


    



O학원을 나온 뒤, 동업자 J와 입점할 학원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나와 J는 아직 20대라 모아둔 돈이 별로 없었다. 모자란 사업자금은 J 가 부자인 그녀의 아버지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며, 쥐어짜 내 듯이 마련했다. 90년대는 20대 미혼 여성이 사업을 하는 건 허영으로 비쳤다.

우리는 더 열심을 냈다. 부지런히 발품을 판 덕에 마음에 드는 상가 건물 1층에 임대 계약을 하게 되었다    

보증금과 임대료가 적정선이었고, 위치도 유동인구가 많은 시장, 교통 요지를 끼고 있어 장점으로 보였다. 


학원을 오픈하고 얼마간은 자리 잡는데, 무척 힘들었다.

호기롭게 O 공예학원을 박차고 나왔는데, 얼마가지 않아 망했다는 소문이 돌까 봐 두려웠다.

자존심을 위해선지, 나 자신을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수소문해서 찾아온 O 학원 수강생들은 눈물을 머금고 돌려보냈다.

내 꼬리표에 달린 원장님의 그림자까지 완전히 떼내지 못하면 진짜 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실력으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알량한 자존이지만, 처절하고 절박했다.


수강생을 유치하기 위해 발이 퉁퉁 붓도록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다. 참 고된 행보였다.

나와 J는 둘 다 운전면허가 없었다. 여성 운전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지만, 흔하진 않았다. 나는 운전면허증을 따러 갔다가 교통사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J는 기계치라서 여러 번 떨어졌다. J도 결국 포기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돈도 차도 없이 참 무모했고 용감했다.

 

소소하게 들어온 수익을 모두 쏟아부어 신문 지면에 크게 광고를 냈다. 그게 큰 효과를 보던 때라서 굶어 죽지 않아도 될 만큼 수강생이 들어왔다.


그 해에 들어온 수강생 과반수가 20대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모여 앉으면 공통적인 대화가 기승전 결혼이었다.  


우리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사회적 통념에 순응하는 세대였고.

결혼이 신분을 상승시켜 준다고 믿고 싶었던, 20대의 순수한 끝자락이었다.


 어느덧, 우리 주변에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이상형이 나타났다.

그 주인공은 내가 입점한 학원의 건물주였고, 개인병원 원장님이기도 했다.

건물주는 30대 중반이었지만, 몇 년은 더 어려 보였다. 키가 크고 얼굴도 준수했다. 패션 감각도 남달랐다. 겉모습으로 봐선 빠지는 게 없이 완벽해 보였다.


5층 건물의 1층은 건물주의 병원과 우리 학원이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 중간에 공용 화장실이 위치했다.

건물주가 학원에 본격적으로 출입하기 시작한 건, 화장실 열쇠를 빌리면서였다. 그는 병원 문만 나서면 화장실 열쇠를 챙기는 걸 잊어버린다고 했다. 그런 핑계로 학원에 자주 들락댔다.

건물주는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런웨이를 걷듯, 학원 입구에서부터 작업실 안쪽까지 둘러보았다. 급한 볼일? 있는 사람 답지 않게 우아하고 느긋했다.

따라서 나와 J,  수강생들 모두의 시선이 은근슬쩍 건물주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었다.


혹자는 20대 젊은 원장인 나와 J 중 한 명에게 호감이 있지 않을까 추측했고.

혹자는 아니다, 수강생 중 30대 주부, 황신혜 빼닮은 언니를 눈여겨 보더라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건물주에 의사라는 부유한 배경에 꽂혀서, 보기에도 민망하게 들이댔다.    


부유한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중략.
이런 진리를 너무나도 확고하게 믿는 나머지 그가 어떤 심정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오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그를 자기 집안 딸 중 누군가가 차지하게 될 재산으로 여기곤 한다.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본문 중에서


고전 로코 명작 <오만과 편견>의 유명한 문장처럼.

부유한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고, 누군가가 차지하게 될 재산으로 여긴다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가 맞는 듯하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우리 모두를 과열된 경쟁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었다.  


어느 날, 건물주의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H가 내 수강생이 되면서 건물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H는 건물주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월급을 제 때 주는 꼴을 못 본다니까요. 비품 하나 사는 것도 발발 떨고, 쫌탱이...."

"에이, 그렇게 안보이던데."

"우리 병원 직원들이 3개월을 못 버티고 그만두잖아요. 저도 적금 만기까지는 참아 보려고요."

나는 H가 하는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건물주의 고교 동창이었다는 주부가 수강 신청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나는 그녀를 사모님이라 불렀다. 건물주와 달리 노안이라 이름에 씨를 붙여 부를 수 없었는데, 자신을 '사모님'이라 부르라고 호칭 정리를 딱 해주었다.

사모님은 H 보다 더 건물주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러려고 작정하고 수강등록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사람은 이유 없이 원한, 미움을 살 만한 관계를 만들면 안 될 것 같다.  

사모님은 건물주의 신상털기에 들어갔다. 그는 총각이 아니라고 했다. 한 번 이혼했고, 사유는 건물주가 바람을 피워서였다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현재 약혼녀가 있다는데, 조만간 결혼하려고 동거 중인 여자와 정리 중에 있다고 했다.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완벽한 껍데기는 모두 사기였다.

나는 피해 입은 것 없이 배신감이 들었다. J도 나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눈시울까지 빨갰다.

J, 너 우니? 그러게 쓸데없이 1등급 한우 세트는 왜 바쳤니, 그래놓고는 재계약 때 잘  달라는 뇌물이라고? 

 

사모님은 우리의 반응에 흡족해하며, 나와 J 가 순진해 보여서 특별히 귀띔해 주는 거라고 했다.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그래 놓곤, 우리 둘 다 건물주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다고 다. 그는 키가 큰 모델형을 좋아한다나. 여러모로 밉상인 동창, 끼리끼리 사이언스였다.

 

그 후로도 건물주는 여전히 화장실 열쇠를 핑계로 학원에 드나들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의 은밀한 시선, 행동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건물주는 유독 눈에 띄게 예쁜 수강생 근처에만 얼쩡댔다.

멋모르고 그를 흠모하는 젊은 여자들의 시선도 즐겼다.

그가  똥밭에? 가기 전에 잠시 꽃밭을 거닐고 싶어 하는 본능을 감히 막을 순 없었다.

그는 무려 건물주였다. 임대료를 인상 못하게 읍소해야 하는, 건물주.

나는 그의 추잡스러운 행보를 몇 년간 더 견뎌냈다.

건물주가 재혼을 하고, 새 아내한테 잡혀서 살며 쌍둥이를 낳고 바람기를 잡았다는, 사모님이 이 소식도 부지런히 물어 날랐다.    


그 당시 결혼 판타지에 사로잡혀 있던 수강생들 하나 둘 현실의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신부 부케도 만들어 줬다. 들고 간 부케를 얼결에 내가 받기도 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했다는 S는 5천만 원이 모이면 이자 생활하며 살겠다고 하더니 (그 당시 정기예금 이자율 10%였음) 그 돈 대부분이 혼수로 들어갔다며 억울해했다. (천만 원짜리 보료를 혼수로 바침)

야무지게 신혼 실림을 장만했던 M은 스탠드, 거울, 시계 등을 정성 들여 만들어 갔다. 신혼초기에 남편에게 화나면, 그것들을 집어던져서 깨뜨리고는 학원에 들고 와서 수리해 달라고 했다.

나만큼 허약하고 마른 A는 결혼 후 더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리고 애를 낳고 난 뒤, 병을 얻었다.

나는 그들의 넘쳐나는 행복한 스토리보다 불행한 서사에 집중했다.

나는 시월드가 무서웠고, 아이 낳다가 잘못되지 않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에 지레 겁먹었다.

서른을 훌쩍 넘어서자, 겁보, 쫄보에서 벗어났지만, 결혼할 상대가 없었다.     

J는 엄격한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결혼했다.

신부 부캐는 내가 받았다.

나는 그 시기를 살아온 여자들 중에 가장 오래 솔로로 남았다. 친구, 지인, 제자들에게 받은 부케의 개수는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엄마는 내가 부케를 받아오는 족족 모조리 없애 버렸다.

그러면, 그 저주 같은 속설이 피해 가기라도 한다는 듯이.  

결혼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시대인데도 부모님은 '결혼해라.'라고 심하게 강요하지 않았다.

고마우면서, 어쩐지 고맙지 않았다.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을 해명해야 하는 그릇된 표상에 떠밀리고 싶지는 않다.   

천천히... 하나씩 나를 바꾸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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