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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yu Aug 06. 2024

엎어지는 자리 쉬어가는 자리

               마흔이라는 나이는....


인간은 마음의 나이 먹는 속도와 육체의 나이 먹는 속도에 차이가 생기는 지점부터 늙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격차는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커진다.
깊은 상처를 가진 존재일수록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상처가 가진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이다.

 이화열 <지지 않는 하루> 본문 중에서


한 지역에서 수 십 년을 살다 보니, 나와 엄마는 유독 눈에 띄는 모녀가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엄마가 뿌려놓은 인심과 활약상 때문이겠지만.

가까운 이웃분들 외에, 내 눈에는 초면이거나 단골이 아닌 가게에서도, 친근하게 아는 척할 때.

엄마와 한 세트로 묶어서 기억하고 있거나 안부나 서비스도 두 배로 챙겨줄 때.

의식하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내가 모르는 상대가 나를 안다는 건, 결코 편하지 않았다.


그 타인이 나를 이상한 이분법에 묶어서 재단하고 오해를 한다면.

노부모를 어딜 가든 모시고 다니는, 효녀로 본다던가.

정확한 내 나이와 미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안타까움과 염려로 포장한 부정적인 시선이 달라붙었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와 이별을 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니는 교회와 사업장 그 인근에 있었다. 한 사람만 거쳐도 만한 좁은 지역 사회였다.

체면과 가식으로 살다 보니, 어느 한 시기에는 한계가 왔다.

일상의 대수롭지 않던 것들에 분노가 솟구치고 만다. 갑갑함으로 매몰되고, 예민하고 더 뾰죡해진다.


 나는 그 시기, 질풍노도와 같은 불혹, 40대였다.


절반도 채 다 쓰지 못한 것 같은데, 몸과 정신, 감정은 바닥이 보이는 위기감이랄까.  

번아웃, 우울, 불안과 관계성의 문제 나이에 올만한 고질병은 거의 다 맞닥뜨렸다.    

우선, 수년간 해오던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다.

IMF 외환 위기도 잘 지나왔고, 전반적인 아트 불황기도 겪어 왔지만, 마흔이라는 불혹병이 급습했을 때, 이겨낼 장사가 없었다.

나는 잘 가던 길 위에서 멈추어 섰다. 아는 풍경이고 익숙한 길인데, 길 잃은 아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견고했던 관계성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친구들과 의도치 않게 이별했다. 

한 친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충격이었고 상실감이었다.  

사소한 여타의 이유로도 친구, 지인들과 서서히 연락이 끊어졌다.

나를 채웠던 것들이 다 떠나고 거들나 버린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매몰되었다. 더없이 나약해지는 내가 싫었고, 외로웠고, 울고 싶었다.

사춘기도 무리 없이 지나왔는데, 마흔은, 나도 모르는 통증이고 아픔이었다. 


40대에는 좋은 관계를 맺기가 힘들었다.

오래되고 편안 사이일수록 사소하게 어긋나고 부대꼈다. 상처를 주고받았다.

대화가 잘 통했던 S와는 무슨 대화든 길게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수 년째 도돌이표 변주곡처럼 같은 문제를 돌리고 있었다.

S는 20년 넘게 다닌 공직에서 마음의 병을 얻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휴직도 해보지만, 안타깝게도 직장 생활이 점점 쉽지 않았다. 곧 대학에 들어갈 가 둘이나 있었다. 사직서쓸 수 없었다.

나와는 또 다른 마흔 병을 앓던 S에게 나는 이타심을 쏟아부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S만은 지켜야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잘할 수 없잖아. 이제 너만 생각해. 남편 혼자 벌라고 하고, 그만 쉬어. 애들도 저 알아서 하게 둬."

"나 잘하는 것 아니다. 제대로 뒷바라지해 줘도 사회에 나가면 들러리 밖에 못해."

"들러리나  것 뭐 하러 고생해서 뒷바라지하냐고."

"넌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아서 뭘 몰라도 한참 몰라."

약간의 우월감으로 어린애 가르치는 뉘앙스였다. 나도 모르게  자격지심이 되어 주눅 들었 이전과 다르게

미혼이라고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는 것에 화가 났다.

"그거 사랑 아니야. 네 남편과 애들한테 이용당하는 거지.  이기심이기도 하고."

우리는 상처될 말을 주고받았다. 

S는 세상에 저렇게 1차원적인 애가 다 있냐는 듯. 보더니.

"공감도 지능이라는데." 했다.

생각 없다고 돌려 까는 거지?

나는 똑똑한 S에게 아트 종사자의 해맑음과 세상 물정에 어두운 부류로 폄하되었다. 

얼마나 많은 비루한 인간관계를 지키고자 애써야 하는 걸까.

이런 문구가 탄식처럼 떠올랐다. 

오래된 친구는 유행 타지 않는 캐시미어 스웨터와 같다는 말이 있다. 나를 가장 편하게 해 주는 옷.

마흔, 그 시기에 있는 친구는 쉽게 변질되고 타버렸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될 말 구분 없이 다 쏟아내는 관계란, 정말 피곤했다. 

그러나, 힘든 시기를 함께 하면서 겪는 공통된 고민, 격통, 어긋남, 반목등 이런 것들로 관계가 때론 단단해지기도 한다. 

내 주변에는 우울하지 않은 40대를 만나보지 못했다. 기혼과 비혼의 한계점은 좁혀지지 않았고, 억지 위로와 공감으로 봉합되지 않았다.

그 대상이 단절하기 힘든 부모, 형제를 제외하고는 이별, 거리 두기를 하느라 주변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일도 관계성도 열폭을 하면서, 마흔은 나를 바꾸어 놓는 기가 되었다.

돌아보니, 엎어졌지만, 잠시 쉬어가라는 자리였다.   


소홀히 했던 나의 일부분을 돌볼 기회였다. 그러나, 짜인 일상과 굳어진 습관에 무언가 더할 수는 없었다. 시간도 에너지도 정해져 있었는데....

문득 만만하지 않은 인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독서를 하지 않은 편은 아니었지만, 편식을 했다. 소설 위주로.

나는 S의 말에 자극이 되었는지, 독서의 폭을 넓혀서 역사, 철학, 심리학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친김에 공부도 했다.

40대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희한하게도, 영어보다 영미 문학에 흠뻑 빠져 버렸다.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하도록 용기를 심어준 건, 평생 미혼, 모솔로 살아온 제인 오스틴이 쓴 로맨스 소설인데,

간접 경험의 힘이 세다는 것만 믿고는... 만만하게 봤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 삶의 이력을 새롭게 쓰게 되었다.

선과 색채, 촉감으로 이루어진 직관과 감각이 지배하던 나의 세계에 활자, 문자, 언어가 만들어 내는 통찰과 사유가 스며들었다.

사람의 감정을 다루고 관계와 사건을 이끌어 가야 하는 장편소설벽만 보고 끝까지 써면서, 그 과정에서 보상을 다 받은 듯, 희열로 가득 채웠던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평가도 관심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출간과 동시에 끝나버렸지만.


지나오니, 정해진 인생의 정답은 없었다.

40대, 또는 50대는 하고 싶었던 것을 해 보거나, 하게끔 밀어붙일 수 있는, 최적의 나이란 건 분명하다.

불혹이란 건, 고착화되기 전의 나를 흔들어 볼 기회라고 해석해 본다.


쉰에 안착하자 S도 퇴직을 준비하며,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하는 상업 아트는 가볍게 여기더니, 순수 미술은 병든 마음의 치료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쓰기(어떤 장르든)에도 치료제라는 강한 력이 있는데, S는 알까?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데....


중년기에 접어 드니, 평준화된 혼자만의 느낌적 느낌이 든다.

이제 나도 당신들과 별 차이 없다고. 소곤소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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