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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yu Aug 27. 2024

엄마와 웨딩드레스

 

도심에서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좋은 장소 중 하나가 백화점일 것이다. 

더위에 식욕을 잃고 축축 쳐져 있는 엄마를 다독여 주려고 주로 근처 백화점에 가곤 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엄마와 보내는 시간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짐통 더위로 이곳저곳 돌아다니기가 힘들 때, 외식과 쇼핑, 영화관, 서점까지 이용할 수 있으니 최적의 장소였다. 시간 절약도 되었다. 


백화점 내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데, 어떤 매장 앞에서 엄마가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는 옷이 있었다. 

엄마는 새 옷 사는 걸 무척 좋아하신다. 

그게 고가의 명품만 아니라면, 지금 당장 당신 눈에 들어와 마음에 쏙 들면, 덥석 집어 든다. 매장 직원이 살짝만 부추기면 구매로 이어진다. 

다른 물욕은 없는 것 같은데, 옷에 대한 충동구매는 억제되지 않았다. 


옷에 달린 텍을 슬쩍 들춰 보니, 내가 예상했던 금액을 초과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로는 빠르게 할부 횟수를 계산해 본다. 나도 여름 셔츠를 사려고 했는데, 엄마가 저 블라우스를 사면 예상 금액을 초가해 버린다. 

길게 카드 할부까지 가지 않으려고, 나는 슬쩍 엄마를 끌어당겼다. 다른 코너로 이끌었다. 

매일 세탁해야 하는 여름옷은 적당히 저렴해야 하니까.  


엄마는 일말의 양심이 없지 않았는지, 발걸음을 떼긴 했다. 시선은 여전히 그 옷에 간절하게 붙박였다. 

당신이 살아생전 마지막 옷이 될 거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며칠 전에도 저 명분을 내세워 옷을 산 것 같은데.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 참을성이 없어졌다. 감정 조절이 안 되었다. 9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고 애써 물욕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엄마의 소비성향은 외가 쪽의 집안 내력 같았다. 

성격과 생김새가 제 각각인 엄마와 이모, 외삼촌 삼 남매에게 유독 닮은 공통점이 한 가지가 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돈 쓰는 씀씀이가 헤펐다. 

조부모의 경제관념은 닮은 것 같진 않았다. 수입품 잡화점을 크게 운영하셨던, 외가의 어른들은 돈 버는 능력이 탁월했지만 낭비벽은 없었다.     

자식들을 풍족하게 먹이고, 입히고, 물건 귀한 줄 모르게 물질 만능주의로 키워 놓긴 했다.   


엄마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와 결혼하고부터 뭐든 아껴 써야 했는데, 처음 맛보는 궁색함에 무척 힘들고 괴로웠다고 한다. 가난한 환경이 잠시 검소하게 만들어 놓긴 했다.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직접 픽한 사윗감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한결같은 우직함, 성실함을 좋게 보셨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딸을 잘 보살펴줄 보호자 자격으로.

아버지는 엄마에게 거의, 외할아버지에게는 무척 잡혀 살았다. 처가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아서는 아닐 것이다?


엄마는 막상 결혼을 해보니, 아버지 본인만 빼고, 모조리 사기였단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 나간 부친을 대신해서 십 대부터 소년 가장 노릇을 했다. 심약한 모친과 여덟 명이나 되는 동생들, 거기에 노처녀였던 고모까지 모시고 살았다.

돈을 버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의 작은 사업장에서 벌어 오는 수입에 기대었다. 아버지는 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켜서 결혼까지 시켰다. 형제들의 집을 마련해 주느라 등골이 휘었다.

엄마는 그 고생을 분담하며, 남편 보다 시아버지 원망을 더 많이 했다. 

그게 다 무책임한 가장의 부재 탓이라고.  


아버지는 부친을 원망하기는커녕 두둔하기 바빴다.

"울아버지는 자손 귀한 집안에 외아들로 태어나 인물 좋고 잘 배우고 똑똑하셨지..."

시대가 시대인지라 나라 잃은 백성이자, 지식인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해서 그 많던 재산을 다 털어먹었다는데.... 

엄마는 아버지가 제 집안을 포장하기에 바쁜 걸로 보였다. 처자식을 방치하고, 윗대에 물려받은 재산까지 모조리 다 탕진한 시아버지가 제일 나빴다. 

그 분노의 기저에는 엄마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던 사건이 있었다. 

하필 결혼식날 시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평생 객지로 떠돌다 중병이 들어서 집에 돌아오셨다.)

상중이라 혼례를 치러진 못했다. 

엄마는 여자 일생일대에 한 번만 입는다는, 눈부시게 하얀 웨딩드레스대신 흰색 상복을 입었다.       

그 후, 임신과 육아로 약식혼례를 치르면서 엄마는 웨딩드레스와 인연이 멀어졌다. 


다른 집에는 있는 부모님 결혼식 사진이 우리 집에는 없었다. 엄마는 그 점에 대해 주눅이 잔뜩 들어 있거나, 가시 돋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엄마는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지 못한 게 한이 아니라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것 같았다. 결혼 전에는 유행하던 옷을 다 입어봤다는 그 자부심에 커다란 흠집을 낸 거였다.  


결국,  나는 할부로 값비싼 블라우스를 엄마 품에 안겨 주었다. 

엄마가 옷을 즐겨 입을 날도 따지고 보면 몇 년이 남았겠나 싶어서였다.

엄마는 새 옷을 사면 옷장에 모셔 놓고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 두지 않았다. 마르고 닳도록 입었다. 가장 최근에 산 옷이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이 제일 먼저 낡아 버리는 경우가 흔했다. 

활용성이 좋으니, 아깝지 않은 소비였다. 문제는 옷을 자주 사 입어야 했지만.  


나는 아이처럼 기뻐하는 엄마를 보며 마음 한편으로는 조상님 원망을 조금 했다. 

친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산이 무책임이리면.

외할아버지는 물질만능주의였다. 


어떤 책에서, 조상이 저지른 나쁜 행동, 습관이 대물림되어 150년 동안 계속 간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가 희생을 각오하고 모질게 고리를 끊지 않는 한, 손자, 손녀에게까지 이러한 질곡이 되풀이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부친의 무책임과 방랑벽을 끊어 내려고 강박적으로 성실하게 사셨다.

세월이 흘러, 나는 땀과 노력으로 돈을 벌어 본 후에야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유전자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노력은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엄마의 옷 사랑에서 파생된, 물질만능적 유전자는 타고나길 건강 미인인 오빠, 언니들에게 외모 지상주의를 더해주었다. 

물질만능과 외모지상 유전자 콜라보였다.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책이라곤 교과서 외에 별로 없었다. 엄마가 외판원에게 사들인 전집은 먼지만 덮어썼고 방치되었다. 

책상과 책꽂이는 언니들의 화장대가 되었고, 옷과 장신구를 넣어 두는 수납장이 되었다. 

나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교과서, 만화, 잡지 외에 무려 톨스토이의 '부활'을 완독 한 사람은 형제들 중에 나밖에 없었다. 가문의 돌연변이인 셈이다. 내 동생도 나와 다른 종류의 별종이었다.


나와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노출되었고, 아팠고 허약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오빠, 언니들의 우월한 건강체와 동떨어진 결함이 있는 유전자였다.  

그토록 두려웠던 죽음과 맞물린 건강하지 못한 몸 덕분에 삶을 더욱 뜻깊게 살 수 있었다. 

신은 내게 허약한 육신을 주셨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살라고. 

어쩌다 보니, 뒤늦게 글 쓰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날씨가 덜 더우면 엄마를 모시고 백화점이 아닌, 시장으로 쇼핑하러 다녀야겠다고 다짐한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근검 절약하는 유전자를 지켜내려면. 

옷보는 안목이 있는 엄마는 시장에서도 마음에 드는 옷을 분명 발견할 테니까.

웨딩드레스만큼은 아니지만, 예쁜 꼬까옷으로 매일매일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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