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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yu Jul 09. 2024

 이제부터 시작이다

세상의 모든 질병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치료가 어려운 뇌질환은, 자신의 성격, 기억 등을 잃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 버리게 만드는, 가족의 아픔, 절망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기억이 강제 종료 되어 버리는 동안,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나의 치부와 마주해야 했다. 




요양 병원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몇 달간 제대로 뵙지 못했다.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짧았는데, 유리막을 통해 뵈어야 했다. 그마저도 전면 면회 금지로 바뀌어버렸다. 

가족과 격리된, 강한 통제 속에서, 낯선 공간, 낯선 손길에 내 맡겨진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폐렴에 걸려 산소호흡기를 끼게 되었고, 실명이 되어, 한쪽 눈은 거의 뜨지 못했다. 뼈만 앙상한 몸에는 욕창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담당 책임자가 바뀌면서부터 몸의 변회가 컸다. 문제점을 제기하면 상급병원에 모셔가서 치료받으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꺼져가는 생명을 두고, 갑질이었다. 

고작 이런 꼴을 보려고 참고 참았나 싶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게 처음 겪는 일이라 대처 방식이 미흡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많이 안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최소한 지금의 죄책감은 조금 줄어들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닐지도 모른다. 

코로나, 격리, 비대면, 면회 금지. 최악으로 치닫는 그때 상황에, 병원 선택조차 운이 안 맞았을 뿐이다.

하지만, 나의 선입견이고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겠지만.

요양병원은 그저 보호 시설이지 의료기관이 아니었다. 바지 원장, 이름만 올려둔 스펙이 화려한 의사. 

오직 간호사와 보호사의 사명감에 따라 의료질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1년 조금 넘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대면 면회가 되어 마지막 생신을 챙겨 드렸다. 

아버지 침상 곁에 둘러 서서 나와 가족들은 울면서 생신 축하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올랐는지,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쥔 오른손을 부르르 떨며 신음소리를 냈다. 손과 발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손 발이 부었다, 가라앉는 걸 세 번  반복하면, 임종의 징후를 알리는 여러 가지 사인 중 하나라는데.  

보는 것만으로  버겁고, 아프고, 심장이 먹먹했다. 무겁게 짓눌러 왔다. 

이제 마지막을 준비해야겠구나, 뵐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기적을 바랐다.

어느 날 정신이 돌아오셔서, '시장하는구나. 집에 가자.' 하시며, 환자복을 벗고 양말을 신고, 집에 돌아오는 꿈을 꾸곤 한다.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간절하셨으면, 펼 수 없게 주먹을 꽉 쥐고, 신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 주먹을 펴 보려고, 내 손가락을 넣어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당신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쉬고 노는 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일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는 걸 힘들어하셨다. 

온몸의 기력이 다 소진되어도 주먹 쥔 손은 펴지 않았다. 그 손으로 소년 때부터 대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고되고 힘겨웠을 텐데. 

지칠 줄 모르는 몸이 풀가동하느라 강제종료된 뇌. 당신의 몸에서 보내는 신호인데, 이제 그만 편히 쉬라고. 그래도 된다고.  

강박증이 될 만큼 힘든 시간을 사셨던 아버지.    

살아내는 것도 의지대로 되지 않듯, 생명의 끈을 놓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 후 2주간, 고통이 서린 거친 숨만 몰아 쉬시더니.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장례는 코로나가 확산되던 때라, 가족과 친척들, 자녀들의 가까운 지인들만 참석해서 조촐하게 치렀다. 기독교 장례로 아버지를 모셔서 감사했다.

대통령, 시장, 도지사, 각 단체장등의 근조기와 화환이 들어왔다. 무공 수훈회라는 단체에서 나와 관포식도 해주고 이 모든 과정을 앨범으로 제작해 주었다. 장례 리무진을 에스코트해 줄 선수 차량도 제공해 주었다.

하관식 때, 진행자가 낭독해 준 내용 중에 아버지가 3년 넘게 6, 25 전쟁터에서 복무했다는 것, 주요한 전투지에 계셨던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청춘을 바쳐 헌신한 공로를 인정하여 국가에서 최상의 예우를 갖추어 준 건 감사한 일인데.

살아 계실 때, 의료 혜택이라도 세심하게 도와줬으면 하는 아쉬움.

90대 아버지에게 조문 와 주셨으면 했던, 지인, 형제들이 살아계신 분이 거의 없다는, 이 상황이 매우 씁쓸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끝까지 모욕했던, 요양병원. 

그쪽에서 들고 온 아버지의 소지품 중, 최신형 필** 면도기는 다른 걸로 대체되어 있었다. 하다 하다 도둑질까지, 욕조차 아까웠다. (유품은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연락도 거의 임종 직전에 알려주었다. 그 하룻밤만 지나면 입원비 한 달분을 온전히 청구할 수 있다는 야비한 계산 속이었다. 

(환자를 돈벌이 수단, 도구로만 여기는 이런 집단에 대해서 허락되는 지면마다 소심하게 복수? 하고 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놓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웠을까.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죽을 것 같은 죄책감, 부족하고 나약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시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입관 때에야 서늘하게 냉동된 육신의 아버지를 뵈었다. 

고인과 이별의 시간이 주어졌다. 수의로 단장하고 누워 있는 아버지, 간병이 얼마나 엉망이었던지, 팔과 다리가 꺾여서 편해 보이지 않았다. 

울분을 삼키며, 아버지의 영혼이라도 참 안식에 들도록 기도했다. 미리 준비해 둔 편지를 아버지 관에 넣어 드렸다.


아버지.

50여 년 동안 아버지와 살면서 한 번도 하지 못한 감사 편지를 이제야 씁니다.

고맙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해드린 게 너무 없어서, 육신의 고통만 더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세상 풍파를 맞지 않게 바람막이가 되어주시고. 

비빌 언덕이 되어 제가 하고 싶은 것들 다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철없는 딸 걱정은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세요. 아버지.

천국에서 다시 뵙기를 바라며.

셋째 딸 올림. 


아버지는 유공자라서 현충원에 안장되셨다. 


신은 하나를 뺏어가면 하나를 주신다고, 나는 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첫 출간을 했다. 그 후, 고된 글 노동에 수없이 좌절했지만, 내 안에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가 지금까지 글을 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나한테도 딱 그만큼만 주어졌다.

나의 진정한 돌봄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부터였다.

백 세에 가까운, 긴 생애를 사셨던 것에 비해 너무 허무하게 짧게 아프셨고, 돌봐 드릴 기회도 주지 않고 가셨던 아버지.

나를 도와주려고, 앞으로 내게 힘든 일 많이 닥칠 걸 잘 아신다는 듯, 경험자의 배려처럼.

당신을 허무하게 보낸, 그 죄책감, 후회는 오롯이 당신 여자에게 쓰라고.


생로 병사에 병과 사는 없을 것 같이 노는 것에 진심인,  노(no) 노(老)족, 엄마를 내 곁에 두고 가셨다. 




                                      

                                             

아버지가 다듬고 사포질 해 주신 오동나무에 내가 그린 시계 작품 Fork Art

       

          

     진짜 돌봄의 시간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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