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생은 인생의 절반가량 떨어져 살았다.
동생이 대학 졸업 후,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나갔다. KOICA (해외봉사단) 단원으로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보내더니, 임기를 마치고도 돌아오지 않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아예 그곳에서 눌러앉아 버렸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면서 20년 넘게 살고 있다.
그동안 나는 동생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동생이 한국에 나오기도 했지만, 우리를 이어주는 주 매개체는 편지였다. 주고받았던 편지만 해도 수백 통이 넘는다. (이메일 포함)
국제 우편을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던 때도 있었다. 동생이 체류했던, 국가적 사정에 따라 길게는 한 달 넘게 걸렸다. 폭동, 분쟁, 911 테러 등을 뚫고 들어간 우편물이 확인되면 그 반가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힘든 시간을 함께한 편지 때문일까, 우리는 어릴 때보다 더 각별하고 돈독한 우애가 생성되었다.
오래 떨어져 살아서 그리움과 애틋함도 컸겠지만, 수년간 쌓아 올린 서신의 부피만큼 더 단단해진 것도 있다.
편지는 마음을 털어놓기에 가장 편안한 미디어라고 한다.
가까이 붙어살았다면 하지 못했을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자잘하고 볼품없는 감정을 문자에 녹여 다채롭고 진부한 감상에 젖어들곤 한다. 편지가 아니었다면, 서로에게 새로운 일면을 꺼내볼 수 있었을까.
2000년대 이후로 이메일을 주로 썼다. 점차 더 편리한 카톡, 영상통화로 바뀌었다.
스마트 폰을 이용하면서 그리움과 애틋함은 사라졌다. 카톡은 깃털만큼 가볍고, 영상통화는 현실 자매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물리적 거리와 시간 차가 존재하는 편지 또는 이메일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미디어였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놓였을 때도 편지 또는 이메일이 요긴하게 쓰였다.
동생이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생겼는데, 전화로 떠들어 댈 수 없었는지, 그 어느 때보다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두 사람은 처음 교회에서 만났다. 거주하는 주(州)가 달라서 자주 만나지 못했다. 주로 이메일로 친분을 쌓았고, 감정을 키워 나갔다고 한다.
예비 제부는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이었다. 반듯하고 깔끔하게 잘생겼다. 좋은 직장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고 동생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다.
그 당시 서른을 넘긴 동생은 제부와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이어 갔다. 제부는 동생과 달리 결혼(제도)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 동생이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처지였다.
나는 답 메일을 썼다. 동생에게 호감을 가진 한국 남자들부터 만나보라고 했고, 더구나 국제결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라서 반대했다.
그러자 동생은 제부가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에 대해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다.
언니라도 내 편이 되어 달라면서.
제부는 멀끔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자신의 어두운 일면과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이 동생을 힘들게 하고, 실망하게 할 까봐 겁나서, 섣불리 결혼에 응하지 못한다고 했다는데....
거절 방법도 고단수였다.
저렇게 건사하게 거절해 대니, 동생이 더 안달 나지 않겠나. 한 끗만 비틀면 사기로 보였다.
동생은 제 마음에 확신이 서면 포기를 모른다.
하지만, 결혼에 뜻이 없는 제부를 설득할 만한 탁월한 비장의 무기란 건 없었다.
줄기차게 나는 좋은 아내가 될 거라는 믿음을 주는 것. 기도하며 그의 결혼 결심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그런 마음을 이메일이나 편지에 담아 줄기차게 보냈다고 한다.
동생의 편지는 상대의 마음을 녹이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동생이 해외에 거주하던 초창기에 내게 보낸 편지처럼, 나와 부모님이 신앙을 가지도록 꼬드긴 전략과 비슷할 것이다.
시간차의 문제였지, 제부도 그 수법? 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제부가 결혼을 결심하자, 느리고 신중한 사람답게 멋진 프러포즈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한세월 더 보냈다.
동생의 험난한 결혼 서사는 Love in Jesus였고 편지의 승리였다.
동생은 해마다 한국에 부모님을 만나 뵈러 나왔다.
결혼 후, 제부가 처음으로 집에 왔을 때였다. 우리 오 남매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기도 했다.
제부와 가족들은 언어적 한계로 어색한 웃음만 잔뜩 흘리고 있던 중이었다.
대화의 포문을 연 건 큰언니였다.
“막내 제부, 미미 (동생의 애칭) 어디가 예뻐요?”
외모지상주의자답게 미국인이 보는 여자의 외향적 기준에 대해서 궁금했을 것이다.
“미미는 비둘기처럼 아름다워요.”
제부가 바로 대답했다.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곧이어 조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은 비둘기 비유도 그렇지만, 동생의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부는 한국어는 몰라도 눈치가 제법 빨랐다. 분위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강조하듯 말했다.
“미미는 예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해요.”
조카들이 더 크게 웃었고, 언니들은 제부의 시력을 의심했다.
동생은 예쁜 것과는 거리감이 좀 있었기 때문이다. 지적이고 야무지고 귀엽게 생겼다는 평이 최대였다.
동생은 외모지상주의로 가득한 집안 분위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학업 성적을 높이고, 똑똑하고 착한 행동으로 관심받고 인정받으려고 애썼다.
눈물겨운 노력이었고, 선행조차 전략적이었다.
어릴 때 내가 자주 아파서, 동생이 막내였지만, 부모님의 보살핌과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희생했다. 동생은 그게 억울하고 서러워서 울다가 스스로 알아서 철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확실한 보상이 주어지는 곳에는 열심을 다 했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의와 부당한 상황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제대로 평가해 줄 더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 건가 싶다. 서러움이 배인 용기가 비둘기처럼 아름답다고 말해 줄 세상에 하나뿐인 짝을 만나게 해 주었다.
나는 언니들이 동생에게 상처가 되는 외모 위주의 발언을 멈추고, 최소한 지금의 화목이라도 지켜주길 바랐는데.
작은 언니가 기어이 한마디 거들었다.
"미미가 성형하면 비둘기랑 비슷해질 것 같은데. 한국 온 김에 쌍수라도 하고 가면 어때?"
그 말에 제부는 더 강하게 반박했다.
"노노. 성형은 미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요. 내가 좋아하는 미미의 모습이 사라지는 거니까요."
가족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제부는 외모지상주의로 가득한 집안의 기세를 팍 눌려 놓았다. 동생은 처음으로 얼굴이 활짝 폈다.
20년 가까이 제부는 동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습관적으로 립서비스 하고 있다.
동생은 예쁘다는 말을 자꾸 들으니, 세뇌당하듯 자의식조차 사라졌다고 한다. 관리를 소홀히 했더니 살이 찌고 눈이 더 작아진 것도 남편 탓이라며, 행복한 불평을 전해 왔다.
나는 오늘도 동생에게 이메일을 쓴다.
내 동생으로 와 줘서 고맙고, 생일 축하한다. 미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