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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름 Sep 02. 2020

나의 아저씨, 페르소나와 그림자

이제 숨 쉬고 싶다는 당신을 위해


좀 늦게, 최근에서야 정주행 한 드라마.

왜 주변 사람들이, 불혹의 남성들이 열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저씨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색깔 문장은 빼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대기업 부장, 건축구조기술사. 변호사 부인

나름 잘 나가는 동훈의 쳐진 뒷모습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부장으로서, 심지어 동네 친구로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

만나는 사람에 맞추어 가면을 쓰고 묵묵히 걸어가는 삶

성공할수록, 인정받을수록

강해지는 가면의 두께   

가면 아래 내 얼굴은 슬픔도, 기쁨도, 아픔도 이제 느끼지 못한다.

방심한 틈

가면 밑 내 얼굴을 누군가가 보았다.     

 

동훈 : 누가 날 알아. 나도 걔를 알 것 같고....
동생 : 그래서 좋아?
동훈 : 슬퍼. 날 아는 게 슬퍼.     




동훈은 대한민국이라는 무대에서 유능한 부장, 착실한 남편, 자랑스러운 아들, 든든한 형이자 동생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인물에게 맞혀 충실하게 연기를 한다.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칼 구스타포 융에 따르면 동훈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면, 즉 페르소나에 충실한 사람이다. 페르소나는 에트루리라의 어릿광대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사회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의무, 역할에 따라 공적으로 보여주는 얼굴이다. 사실 동훈이 그러하듯 페르소나는 사회에 적응함은 물론 소위 ‘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나의 일부다. 우리는 주로 페르소나에 의해 사람들과 관계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충실하게 살다 보면 사회에서 보이는 모습에 치중하기 때문에 진짜 자신의 모습은 없어진다. 페르소나가 삶의 목적이 되는 순간부터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 대신 사회가 요구하는 삶이 자신의 삶이 된다. 이들은 남들이 원하는 대로 가면을 쓰고 그들의 주문에 따라 사회라는 무대에서 연기를 한다. 더 이상 자신의 해석이나 생각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충실하게 연기를 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결국 무대는 끝이 난다. 성공한 직장인이라는 역할도, 희생적인 부모의 역할도, 순종적인 딸이라는 역할도 조명과 함께 사라진다.      


나는 20대 후반까지 굉장히 밝고 재미있는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자신을 매우 사랑했다. 하여 사람들과 만나면 재미있게 해 주려고 무진 애를 쓰곤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면 '오늘도 임무를 잘 완수했다'라는 마음과 함께 한켠으로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냥 편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내 속에, 짜증 나고 열 받고, 투덜 되는 내 마음을 누군가가 볼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이 혹여 나올까 봐 언제나 밝은 캔디라는 가면을 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야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야만, 그렇게 인정받는 나여야만 된다는 생각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끝에 ‘진짜 그런 모습이어야만 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걸렸다.  




동훈 : 근데 나 그렇게 괜찮은 놈 아니야
지안 : 괜찮은 사람이에요. 엄청.. 좋은 사람이에요 엄청     


나의 모습을 오롯이 다 본 사람이, 차마 그 누구에게도 나에게조차 보여줄 수 없는 내 모습을 다 본 이 사람이 내게 말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설마.... 나의 맨 얼굴.. 괜찮은 걸까?




융은 진정한 자기(self)를 만나려면 페르소나 아래 민낯, 그림자를 만날 것을 권유한다. 그림자는 의식에서 억압되어 어두운 무의식에 있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나 욕구이다. 진정한 나를 찾아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진 페르소나가 무엇인지 인식함은 물론, 그림자가 무엇인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날 나는 괴로워도 슬퍼도 포기하지 않고 밝게 웃는 ‘캔디’라는 페르소나 아래, 괴로우면 쏘아버리고, 슬프면 울어버리고, 포기하고 싶으면 놓아버리는 그림자, 캔디의 그림자를 알게 되었다. 캔디의 웃음을 위해 그림자의 모습은 어둠 속에 묻어두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저 그런, 어쩌면 지질하기 까지 한 내 모습은 가면 속에 잘 감출 수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나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번듯한 직위와 안정된 직장을 얻어야 할 것 같은 마음 아래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맘대로 살고 싶은 내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가장으로서 괜찮은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모습 저 아래에는 남자로서 져야 하는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 하나의 욕구에만 충실하고 싶은 우리 자신이 있을 수 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책무를 다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모습 저 아래에는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훌훌 털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고 싶은 우리가 있을 수 있다. 좋은 딸이, 아들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저 아래에는 간섭받지 않고 내 욕망대로 행동하고 싶은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 많은 돈, 보다 나은 직위를 위해 전진하려고 하는 모습 저 아래에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미친 듯이 오늘 행복하고 싶은 우리가 있을 수 있다. 사회에서 기대하고 인정해주는 가치를 따라서 사는 우리 속에는 사실 내 본성과 욕구에 충실하고 싶은 우리가 있을 수 있다.     





동훈 : 너 나 살리려고 이 동네 왔었나 보다.
다 죽어가는 나... 살려 놓은 게 너야.      


처음에 네가 날 아는 게 슬펐어. 그런데 사실 내가 내 슬픔을 아는 게 두려웠던 것 같아. 이제 나는 내 슬픔을 알아. 슬퍼서 눈물이 나. 이상하지? 내 슬픔을 인정하니 왜 자유로워지는 거지?




어느 순간

가면이 버거워질 때가 있다. 숨이 찰 때가 있다.

문득 그런 날 가면을 벗어 놓고, 민낯의 나를 만나보자.

서글픔, 서러움, 분노, 외로움.. 감정이 오고 간다면 그저 바라보자.

이런 감정들이 왜 생기는지, 이 감정들은 마땅한지 아닌지, 이 기분들은 유익한지 해로운지 등 분별하거나 판단하는 생각은 밀쳐내 버리자.

그저 가만히 묵묵히 그 감정 옆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안아 주자.       


당신은 이제 그렇게 자유롭게 지낼 자격이 있다.
충분히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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