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공부하면서 프로이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심리학이 아닌 교육학에서 공부를 한 탓에 정통하게 정신분석을 공부하신 교수님도 계시지 않았고, 주로 수련을 해주신 슈퍼바이저 선생님들도 정신분석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싫어했던 이유는 아동기 경험이 지금 내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가정이(?) 싫었던 거 같다. 그렇다. 싫었다. 믿어지지 않기도 했지만 더 정확히는 싫었다. 소위 ‘개밥에 도토리’ 같은 신세로 태어나 성장한 나는, 그토록 선망한 ‘구김 없고 밝은 부잣집 고명딸’ 같은 성격은 될 수 없다고, 프로이트는 내게 절망적인 예언을 했기 때문이다.
미란은 몇 년을 친하게 지냈던 동료이다. 최근 그녀에게 축하할 일이 생겼다.
생일, 대학 입학 등등 축하받을 날마다 축하를 받지 못해 쓸쓸했다는 그녀를 위해서 동료들과 깜짝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 샴페인, 케이크, 그리고 우리 모두 그녀를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그녀를 부르러 간 친구뿐이었다. 미란은 축하를 받지 못해 쓸쓸했다는 이야기는 내게만 털어놓은 이야기라며,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사람들을 모은 것이 화가 났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숨기고 싶은 모습을 드러낸 나에게 섭섭하다고도 했다. 최근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서 파티는 의외의 행동이라고도 했다.
(나는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만 말한다. 그녀가 자신에게 느낀 그 감정들은 그녀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렁거렸다. 가슴이 묵직하고 마음 한 켠 비릿함이 가시지 않았다. 주말에 시간을 보내고, 가족에 대한 고민을 나눌 정도로 친했던 사람에게 고작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까발릴 정도의 사람으로 생각된다는 것이 미칠 것 같았다. 눈물이 났다. 슬퍼졌다. 근데 누군가가 물었다.
왜 슬퍼?
화가 날 수는 있는데, 왜 슬퍼?
지금은 알부자들이 산다는 금호동이 달과 가장 가까워서 달동네라는 정겨운 애칭을 갖고 있던 시절, 비탈 사이사이에 흩어져 있는 집으로 직접 배달해주는 요구르트는 ‘희귀 템’이었다. 우리 집에도 희귀 템이 매일매일 배달되었는데, 그 주인은 언제나 남동생이었다. 고작 3살 정도 어린 남동생의 입에 노란색 액체가 들어갈 때마다 왜 나는 사주지 않냐고, 왜 나는 못 먹냐고 말했더랬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동생이 어려서라고 했고, 한 살 위 둘째 언니는 요구르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책을 읽었고, 큰 언니는 쨍쨍이 또 시작이라고 말하곤 했다. 요구르트도, 동생도, 언니들도, 엄마도 미웠던 것 같다. 하지만 가장 미웠던 것은 엄마 말처럼 양보도 하지 못하고, 둘째 언니처럼 착하지 못하고, 큰 언니 말처럼 짜증 내며 질질 짜는 나 자신이었던 것 같다.
정신분석에서는 아동기(0-6세)에 형성된,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감정적 양식(일종의 패턴)이 이후 생애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배척받았던 소녀는 일생 동안 배척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즉 남편이나 자녀들, 친구들이 아무리 헌신적으로 행동한다 해도 배척받는 존재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어린 시절 어머니의 편애로 인해 남동생에게 갖던 질투심은 어머니를 비롯하여 큰언니, 둘째 언니, 남동생 모두에게 질타의 대상이었다. 나는 약하고 어린 동생을 시샘하는 나쁜 애이며 자기 것을 챙겨달라고 소리 지르는 욕심쟁이였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만큼 비례하는 질투를 억누르지 못하는 나를 가족들이 싫어하는 것 같아 외로웠다. 그러나, 사실 편애에 대한 질투는 자연스럽고, 나도 챙겨달라는 울분은 정당하다. 사실 반성의 몫은 어머니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어린 나는 몰랐고 그 시절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 저 사랑받고 싶어요. 남동생만큼 똑같이 사랑해주세요.
어머니, 언니... 제발 제 마음을 이해해주세요.
저를 외롭게 하지 말아 주세요.
미란의 잔인한 오해에 화가 났다. 하지만 슬픔은 화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화는 날 만하다. 미란은 어떤 이유로-그 이유는 미란만이 알 것이다- 사실과 다르게 나를, 내 의도를, 내 행동을 판단하고 확신했다. 물론 그 확신에는 내 행동의 몫도 있을 것이다.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경솔한 내 행동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 또한 확신 전에 친했으니 말했었어야 하지.... 그런 황당한 오해로 내 성의를 날려 버린 것에 화가 날 만하다. 그리고 그것이 미란의 황당한 상상임을 알고 있으니 어쩌면 나는 황당하네 하고 넘길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미란을 측은히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슬픔은 느닷없다. 사실 슬픔 뒤에는 ‘내가 그 정도의 인간으로,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나를 보았다는 것이, 보였다는 것이, 오해받았다는 생각이 숨겨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사랑받고 싶어 ‘쨍쨍’이던 7살 꼬마의 슬픔과도 같았다. 사랑이 받고 싶다고 느낄수록 동생을 미워하고 자기 욕심만 부리는 나쁜 아이로 오해받았던 억울함. 두렵고 슬펐던 것 같다. 나쁜 아이인 나를, 나쁜 사람인 나를, 사람들이 싫어할까 봐, 그래서 외로워질까 봐...
철저히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기대었던 잔혹한 상상을 내게 쏟아 내고, 미란은 아무 일 없이 나를 바라보고 나를 대한다. 또다시 7살 꼬마가 되어 슬퍼 지려 했다. 그런데 불현듯 깨달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미안해. 내 오해였어. 너를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어. 너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슬픔과 함께 잠시 선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너,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하니?’
미란에게 말한다. 찡찡거림도 머뭇거림도 없다.
‘너는 나를 오해했어. 이제 허상 속 나를 진실의 나로 착각하는 오만을 멈추렴.’
7살 어린 소녀는 이제 40살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