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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름 Dec 19. 2020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사랑의 상처

20대를 마감하던 해 이맘때쯤이었다. 


2시간여 지루한 논과 구불구불한 산길을 헤 메이다 찾은 교육원에서 세련 언니를 만났다. 그곳을 찾은 이유는 일종의 마음 성장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초보 상담자라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거부할 수 없는 권유가 없었더라면, 나름 10여 년의 기독신앙을 가졌기에 불교 교단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9박 10일 동안의 그 프로그램에 거금의 참가비를 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불경을 외는 스님이 아닌 개인적인 고충을 내놓는 스님들에게 익숙해지기 전에, 그리고 졸지 않고 명상을 하는 경험에 익숙해지기 전에 그 산을 내려왔을 것이다.     


세련 언니는 그때 아마 30 중반의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드러운 눈매, 오목조목한 입술과 오뚝한 코를 가진 얼굴과 날씬한 몸매의 그녀는 집단에서 참 인기가 있었다. 그 인기는 언니의 외모도 한몫했겠지만 사실 풍기는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밝고 친근하고 솔직하고 털털했지만 왠지 외로움과 쓸쓸함이 느껴지던 사람.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해서 만나서 5분 안에 누구에게나 생각을 간파당하는 나로서는 언니가 가진 이미지는 질투 나는 것이었다.


4일의 밤을 보낸 날 점심, 

전화기 앞에 언니가 서있었다. 멍한 눈과 파르르 한 입술이 나에게 말했다.

 

"수현님, 아들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데 집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질 않아."

    

그녀는 어릴 적 친구가 있었다. 둘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리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느 날 남자가 말했다. ‘너랑 결혼을 하고 싶어.’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나는 너를 남자로서 사랑하지 않아. 넌 나의 친구야’. 남자는 괴로웠다. 얼마 후 그는 결혼을 했다. 그녀의 마음은 텅 비었다.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녀도 누군가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종종 되뇌곤 했다. ‘그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렇게 해 주었는데…’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시렸다. 시린 마음은 서늘한 기억으로 데려갔다.

'마음이 식었다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해요라던 그 여자... 그리고 초라하게 허둥대던 여자'

짜증이 다. 그따위 기억에  분노와 함께 여전히 먹먹한 슬픔을 느끼는 가슴이 한심하기만  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지도자 스님이 맑은 물이 담긴 투명한 통을 가운데 놓으셨다. 그리고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셨다.


‘이 더러운 잉크가 너희의 마음속에 있는 오염된 것이다. 이 혼탁한 그릇에 맑은 물을 부음으로서 너희 맘속에 있는 오염된 것들을 흘려보내라.’  

   

한 사람씩 일어나 물통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언니의 차례가 되었다. 앞에 놓인 맑은 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통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한동안 물통을 바라보던 언니의 두 눈이 촉촉이 젖었다. 두 손으로 물을 부으면서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떨리면서 말했다.


‘석영아, 네가 있어 행복했어. 이제 너를 보낼게.
그리고 세련아 석영이를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지 못했던 너를 용서할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용서했다

모질었던 그 사람이 아니라 모질지 못했던  자신을.

긴 시간을 미워했었다.

그 사람의 흔들림을 애써 모른 척했던 나,

헌신으로 포장하며 내 마음을 무시했던 나,

그 사람의 뒷모습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나, 

그리고 모질었던 그 사람을 정작 미워하지 못했던 나.


한심한 나를 용서해주니 내가 참 안쓰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 부끄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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