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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혜리 Nov 05. 2023

나에게 힘이 된 한마디의 말


사람은 누구나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아니든, 나는 안 좋은 기억은 대부분 잊어버리려고 하는데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은인 같은 사람이 세분 계신다.


지금은 학생이 없어 폐교된 시골의 조그마한   학교에 우리 학년은 남녀 각 한 반이었는데

졸업을 하고 나서 몇 년 뒤에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 두 분을 모시고 학교에서 반창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반창회를 하는 전날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하룻밤을 묵고 나서 신작로의 정류장에서 마을 친구들과 함께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타고 갈 차가 도착하여 버스에 오르니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이는데 시장에서 볼일을 보시고 읍에서 타고 온  어르신들로 인하여 좌석은 만원이었다.


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한 손으로 의자를 잡고 서 있었는데 마침 잡은 손잡이의 의자에 일이 학년 때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앉아 계셨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자  "혜리 왔니?"라며 말없이 한 손으로 내 손을 잡으셨는데 선생님의 따뜻한 체온과 함께 나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였다.


그날 우리는 함께 모여 그간의 소식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나와는 오촌이 되는 당숙부의 딸인 육촌언니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나는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결혼식장엘 갔는데 예식장의 로비에서 육촌 오빠와 언니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결혼식에는 사촌들도 보였는데 식을 보고 나서  우리는 당숙부님 집에서 열리는 피로연에 참석을 하였다.


차를 타고 얼마 후에 도착한 당숙부네는  마당에 잔디가 깔려있었는데 이층으로 지어진 양옥의 거실에서 함께 온 사촌들과 우리는 떡국과 전 등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나무로 만든 네모난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데  신랑신부가 인사를 하고 나간 후에 방으로 들어온 작은 당숙부는 내 얼굴을 보시더니 " 너는 집에서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라" 하셨다.


중학교를 다닐 때 나와 앞뒤로 나란히 앉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시골 아이답지 않게 피부가 뽀했는데

비가 오면 망토 같은 빨간 비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항상 알록달록한 우산이 들려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얼굴을 익히며 이야기를 틀 무렵의 어느 날, 옆에 앉은 친구와 장난을 치는

내게 친구는 시끄러웠는지  " 혜리야, 너는 모범생이면서 그렇게 시끄럽게 굴면 되니?" 라며

말하였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으며 내게 말없이 손을 잡은 선생님은 일이 학년 때 담임을 맡았으며 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내가 문예반에서 동아리활동을 할 때도 지도를 하셨는데 반창회를 하는 그날의 버스 안에서 선생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내가 길을 잃을 때마다 등대가 되었다.


키가 크고 훈남이신 오촌 작은 당숙부는 군에서 재직하다가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셨는데 세상에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나 없던 내게 그분의 말은 때로는 족쇄가 되기도 하였지만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침반이 되어 준 잊을 수 없는 한마디였다.


함께 한 시간이래야 고작 이년이 못된 채 세상을 떠난 내 친구 근영이.


길거리에서 만난 동기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여도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의 얼굴은 여전히 생생한데 개구쟁이인 내게 남긴 그 한마디가 평생 화인으로 남아 버팀목이 되었다.


오촌 당숙부는 몇 년 전 타국에서 암으로 돌아가셨다. 남편을 따라간 선생님은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 중이라고 들었는데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내 삶을 든든하게 지탱하게 해 주었다.


내 친구 근영아, 보고 싶구나. 잘 지내니?

나중에 널 만나면 꼭 전하고 싶어.

너의 한마디로 내가 지금껏 살아남아 있다고.


세분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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