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 혜리 Aug 10. 2023

미움받을 용기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도 있는 듯 몇십 년 만에 결성된 동창회를 나는 육 개월에 한 번 꼬박꼬박 참석을 하였다. 아무 내막을 모르는 친구가  맥주잔 가득 술을 권할 때는 손사래를 치지 못하고 한두 잔 받아마시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편도염으로 약을 처방받아야 하였는데 얼마 후 따로 모임이 하나 더 만들어졌고 나는 억지춘향이가 된 것 같아 모임에서 져나갈 타이밍을 노리다 S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사촌에게 지목되어 덜컥 무를 맡게 되었다.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 바닥난 체력으로 거부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할 사람이 없어 임기만 채우고 그만두리라 하고 맡은 자리였는데 하루는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며 밤늦게 회장이 내게 문자보냈다. 다음날이 발인이라 회비를 집행하려면 의견을 모아야 하는데 할 수 없이 나는 톡방에 회원들을 초대하여 의견을 물어보았다. 회칙에도 없는 경조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겨우 의견을 조율하여 일을 진행하였는데 맡은 자리로 인하여 안부를 물을 겸 가끔 회원들에게 전화를 돌리게 되면 누구는 정치에 관심을 많고 또 다른 회원은 아는 환자가 병이 재발하여 다시 치료를 받는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하였다.


엄마는 농사를 지을 때 큰집 일을 해주는 대신 트랙터 같은 농기계를 빌리곤 하였다. 농기구를 사용한 횟수보다 일을 더 하는 일이 많았는데 앉아서 해야 하는 밭일이다 보니 한쪽 다리를 절게 되셨다. 통증에 아파하는 엄마를 위하여 나는 수술 날짜를 잡았는데 마침 공무원 발령을 기다리는 여동생이 있어 엄마가 입원할 기간 동안 함께 있기로 하고 나는 차를 몇 번 갈아타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갔다. 수술을 하고 퇴원을 얼마간 우리 집에서 몸조리를  엄마에게 몸관리를 잘하시라 신신당부를 하여 시골로 내려가셨는데 고향집으로 내려가신 후 두 달이 채 안되어 일을 도와 달라며 집으로 찾아오는 사촌오빠 때문에 일을 나간 엄마는 얼마못가 다시 다리를 절게 되었고 나중에 두 번째 시술을 하시게 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학교보다 상급학교를 가기를 원하며 우는 여동생 뒷바라지를 위하여 매일 도시락 두 개를 싸며 학교를 보냈는데도 여동생은 엄마처럼 불만을 품으며 잘된 것은 본인이 잘난 탓이고 잘못된 것은 모두 내 탓으로 돌리며 원망을 하였다. 그런 동생이  왜 그 학교를 보냈느냐며 또 원망을 하였는데 나는 끝까지 지키려고 한 비밀을 털어놓아야 했다. '내가 좋아서 한 게 아니고 엄마가 나보고 너희들 책임지라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여동생은  '언니는 착한데 원래 하던 데로 해라'라고 말하였다. 첫째로 태어난 내가 젖먹이일 때 젖이 안 나와 쌀로 미음을 쑤어서 먹였다는 엄마는  불리하면 그 말을 되풀이하시며 '우리 집 아이들은 모두 괜찮다'말을 하셨다. 그런 말을 엄마가 하는 사이에 나는 배를 곯으 학교를 갔고  학비를 벌어야 했으며 집을 지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엄마는 모든 것이 불만족이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말이 들어맞는 듯 논에 물이 들어 받은 보상금이며 소 판 것까지 우리 집에 뭔가가 생길 때마다 큰아버지는 우리 집에 찾아오셨는데  욕심이 지나치면 자기 눈마저 멀게 하는지 몇 년 전 사촌오빠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큰댁은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하였다. 술을 마실 때면  머리꼭지까지 마시는 사촌에게 나는  술이 깰 때까지 집에서 자고 가라는 말을 모임 때마다 하였는데도 내 말을 듣지 않고 집으로 간 사촌이 내가 마치 자고 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듯하였다고 친구는 말하였다.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도 자정너머까지 남의 집에서 술시중 들기를 바라는 사촌이 나는 꼰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임기가 끝나자마자 모임을 그만두었는데 총무는 그만두더라도 모임에 계속 나오라는 사촌에게 '나는 여기까지다'라고 말하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나는 딱 한번 대든 적이 있었다. 몸이 아파 집에 쉬려고 온 내게 또다시 노름을 하겠다며 돈을 내놓으라는 말에 나는 그날 죽기를 각오하고 말했는데 술에 취하여 소리를 질러대던 아버지는 순간 멈칫하며 '잘못했다. 그만해라'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생이 타 도시로 떠나고 혼자 남았을 때 친척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여 나는 얇은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하여 겨울을 보냈다. 방을 구하려고 모은 것을 엄마가 친척에게 빌려주어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외할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오랜만에 도시로 온 엄마는 밤에 내 집으로 오셔서는 방이 너무 춥다며 혼자 이모집으로 내려가셨다. 추운 겨울날 난방도 되지 않는 차가운 방에 나를 버려두고 간 엄마는 왜 맞기만 하고 아버지에게 제대로 한번 따지지를 않았는지 일을 해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 큰집을 향해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라도 기다려달라 왜 말하지 못하였는지 한 번이라도 용기를 냈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지난 몇 년여 동안 엄마와 동생들에게 할 도리를 하는 선에서 나는 내게 집중하였다. 안 보던 영화를 보고 영어를 배우며 식물을 키우고 여행을 하여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가졌는데 외로웠지만 행복하였다. 병을 앓은 이후 몸이 허약하지자 평소 나는 사람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길 원하였는데 모임을 줄이고 타인보다 탐색하며 남은 삶을 미움받을 용기로 살아보려고 한다.


마치 가재가 살이 차오르는 껍질 때문에 심해로 내려가 껍질을 깨고 다시 올라오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휴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