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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운 Jun 25. 2024

불행할 때 ‘행복하다’ 10번 외치기

극 예민좌의 감정루틴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클로즈업된 화면엔 펜싱 국가대표 박상영 선수의 모습이 커다랗게 잡혔다. 2016 리우 올림픽 에페 1라운드에서 13:9로 지고 있는 상황, 그는 혼잣말로 ‘나는 할 수 있다’를 대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다 늦었다고 말할 무렵 결국 15:14의 역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침대에서 ‘나는 행복하다’를 홀로 외치고 있었다. 본가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부모님 댁에 돌아오자마자 무기력이 찾아왔다. 나는 환경이 바뀌면 몸이 바로 반응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낯선 환경에 가거나 갑자기 근무 환경 등이 바뀌면 몸이 바로 신호를 보낸다. 주된 증상은 이유 없이 기분이 다운되거나 의욕이 사라지는 것, 두 번째는 식욕이 폭발하는 것이다.      



20대 후반 첫 직장을 얻었을 때 나는 몇 달간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곳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다운되고 기력이 없어졌다. 다음 직장으로 이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가고 싶었던 곳이었음에도 발령 날짜가 다가올수록 원래 있던 곳에서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부모님 댁에 들어온 뒤로 나는 몇 주째 그때와 비슷한 기분에 사로 잡혀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조금 어려운데, 답답하고 꽉 막혀있는 듯한 느낌, 다 잘 안 될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 <해리포터>에서 디멘터가 등장했을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싸한 느낌. 공포와 불안, 두려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 그래, 이 정도가 딱 적절하겠다.            



체중도 늘었다. 나는 본가에서 이상하게 ‘입이 터졌고’ 이사 온 후로 단 걸 많이 먹었다. 퇴근길에 초콜릿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와서 퍼먹거나 밤 10시에 냉장고를 뒤져 야식도 꺼내 먹곤 했다. 혼자 살 때는 텅 비어 있던 냉장고가 엄마 집에서는 왜 이렇게 꽉꽉 차 있는지. 기분도 별로인데 살까지 찌니 짜증도 늘었다. 볼록 튀어나온 뱃살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도 쌓여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지인과의 식사 자리에 우연히 그녀가 동석했다. 나는 분위기도 풀 겸 고민을 털어놨다. 본가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무기력하고 내내 기분이 안 좋다고. 식사량도 늘고 군것질도 많이 하게 된다고.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앉아 듣고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은 말에 따르면, 나는 지금 ‘적응 몸살’을 앓고 있는 거라고. 나는 원래 민감한 사람인데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서 몸이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거라고.


      

무기력한 기분은 불안이 긴장감과 함께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일 확률이 높고 많이 먹게 되는 건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몸의 적응기제일 수 있단다. 면접 같이 떨리는 상황에서 다리를 떠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저 다리를 남들보다 심하게, 오래 떠는 것일 뿐이라고.



문득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오은영 박사님의 말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 종일 누워서 침대와 소파와 때론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있는 금쪽이었다.


영상 속 아이는 살이 포동포동 올라있었고 소파가 사람으로 변하면 저렇게 될까 싶을 정도로 드러누워서만 생활했다. 그런 금쪽이를 보고 오박사 님은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아이가 눕는 이유는 게을러서 가 아니라 불안도가 높아서 그런 거란다. 학교처럼 시시각각 돌아가는 상황에서 늘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집에 와서는 이를 풀기 위해 쉬고 있는 거라고.      



순간 우리 집 금쪽이는 내가 아닐까 생각했다. 부모님 속을 썩이는 건 초등학생 '눕둥이'나 마흔에 컴백한 ‘늦둥이’ 딸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나도 불안감을 누르기 위해 스스로 디멘터를 소환하고 그토록 많이 먹어댔나 보다.






생각해 보니 나는 꽤나 예민한 사람이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가 더 중요했고, 낯선 사람을 만날 때면 남들보다 유난히 긴장하곤 했다. 여행에 가면 계획에 집착하는 버릇은 ‘불확실함’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서.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선생님은 내게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 니 안심하라고 하셨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암시’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이루고 싶은 상태나 갖고 싶은 물건, 혹은 기분 등을 반복해서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될 확률이 크다는 이론. <시크릿>의 마법.



그날 이후로 일어나자마자 ‘나는 행복하다’를 10번씩 외쳤다. 누가 들을까 아주 조용히, 혼자서. 입만 뻥끗 거리며. 그랬더니 정말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아졌다. 그렇다고 기분이 막 날아갈 듯 ‘업’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일어나자마자 드는 그 ‘디멘터적인’ 느낌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군것질도 줄었다. 역시 모든 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지금도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별로일 때는 외치고 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이 집에서 펜싱 국대 박상영 선수처럼 금메달을 딸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동안은 조금 더 행복하고 덜 불안했으면 좋겠다.     



혹시나 나처럼 주변 환경에 예민한 ‘극 예민 좌’나 불안하면 뭔가 자꾸 먹게 되는 ‘불안 먹깨비’들은 적절한 상황에 이 방법을 써보길 바란다. 생각보다 꽤 효과가 있다. 참고로 이 일은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 부모님이 아시면 섭섭하실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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