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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39 막내딸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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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새로운 Jun 18. 2024

예순 엄마와 공황장애

예순 인 엄마는 요즘 손녀를 보는 낙으로 산다.

퇴근 후면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손주 사진을 보고 하루동안 쌓인 피로를 풀어내는 게 그녀의 일과가 되었다.

“아이고, 어쩜 이렇게 이쁘니~? 인형 같아!”

"그러니까, 왜 이렇게 귀여워? 손도 발도 쪼그맣고 어쩜 이렇게 귀여운지 몰라"

여기서 잠깐 나의 조카 자랑을 하자면 그녀는 고모인 내가 봐도 참 특출 나다. 옹알이도 남들보다 빨랐고 몸동작도 날렵해서 남들은 한살이나 되어야 할 수 있다던 침대 오르기도 8개월 만에 해냈다(죄송합니다, 조카바보예요).

그런데 최근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엄마의 고질병인 ‘걱정병’. 그녀는 걱정이 많다. 아주 많다. ’ 엄마들은 원래 그렇지 않아?’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우리 엄마는 좀 심하다. 문제가 하나 생기면 걱정에 잠도 못 자고 악몽도 꾼다. 결국 걱정병은 몇 년 전 공황장애 증상으로 나타났다.

당시 집에 안 좋은 일이 겹쳤다. 가족 모두 힘겨웠지만 엄마는 유독 증상이 심해서 응급실에 몇 번씩 실려 갔다. 그때는 나도 아빠도 엄마의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 내가 사고를 쳤다. 그날도 늦은 저녁 단톡방에 올라온 조카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상 속에는 귀여운 조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영상을 한참 들여다보던 엄마가 슬슬 걱정 엔진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근데 우리 00 아토피 어떻게 하니? 크면 더 심해질 텐데... 미역이 좋다는데 좀 싸서 보내줄까 봐"

"... 오빠 올 때 싸주면 되겠네"

"근데 우리 00은 아무래도 다른 애들보다 좀 작아, 그렇지? 이렇게 안 크면 어떻게 하려고..."

"...."

“머리는 왜 이렇게 또 안 자라는 거야~? 빨리 자라면 예쁜 삔 하나 사주면 좋겠구먼...”

“.... 응, 하나 사서 보내줘”

(잠시 후)

“아니, 밥은 또 왜 이렇게 조금씩 먹는 거야~? 키 크려면 잘 먹어야지 넌 이것저것 잘 먹었는데 얘는 너무 안 먹어서 큰 일이야.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안 먹나 몰라 우리 때는... (이런저런 옛날이야기와 걱정이 무한정 쏟아지는 중...)"

"... 엄마!!!"

"어머나, 깜짝이야"

"아니,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아, 애가 알아서 크는 거지. 그런 건 새언니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엄마는 뭐 그렇게 항상 걱정이 많아?! 나까지 노이로제 걸리겠어!"

"......"

아뿔싸.

나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수습한다 치고 더 이상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엄마가 쓸데없는 걱정만 하니까... 머리나 키나 그게 뭐 대수인가? 뭐 그런 걸 걱정하고 그래? 그리고 우리처럼 ‘시’ 자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랬어. ”

“....”

엄마는 좀 전까지만 해도 나를 여우처럼 쏘아보더니 이내 불쌍한 강아지 표정을 드러냈고 곧 성난 도깨비 상이 되어 울분을 토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걔들한테 한마디 하길 하니? 안 그래도 신경 안 쓰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너니까 이런 이야기하는 거지! 알지도 못하면 가서 잠이나 자!”

맞다. 그녀는 드라마에 나오는 시어머니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평소 아들에게 전화 한 번 안 하고 있어도 없는 듯, 가끔 손녀 사진 좀 보내달라는 정도였다. 첫 손주라 해주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아들 내외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녀는 한풀이를 이어 나갔다.

"아니,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말 하는 거 가지고 너는 왜 그래? 내가 딸한테 이런 말도 못 해? 그럼 나는 도대체 누구한테 말하니? 네 아빠는 맨날 나한테 불평만 하고, 너는 너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나는 도대체 누구한테 말해? 그럼 내 말은 누가 들어줘? 너 이럴 거면 다시 짐 싸서 나가!"

"… 엄마 그게 아니라..."

그날 밤 엄마의 말이 귓가에 맴돌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럼 나는 누구한테 이야기해?"

....

몇 년 전 엄마는 불행을 이겨내고 있었다. 해외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오빠는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몇 년째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고 장사도 점점 안 되는 눈치였다. 장사가 안 되니 아빠는 술을 더 마셨고 엄마는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하고 홀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상태를 전혀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모른척했다. 모른척하고 싶었다. 나는 내 인생을 버티기 바빴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그녀의 병을 알게 된 건 그녀가 응급실에 실려 간 후다. 아빠 말에 따르면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협심증 같다고 했지만 막상 검사를 해보면 이상이 없었다. 그 후에도 엄마는 몇 번 더 응급실에 실려갔고 내가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엄마의 증상은 스트레스로 인한 공황장애란 것을 알게 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형편, 지 잘난 줄만 아는 딸. 어디 하나 이야기할 곳도 없고 스트레스를 풀 곳도 없던 엄마는 그저 홀로 마음의 병을 키워왔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불행에 눈을 감았다. 엄마처럼 될까 두려웠고 그래서 그녀의 삶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이겨내기보다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곤란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버리는 성격, 부정적인 상황에서 쉽게 좌절하는 습관. 그 사이 엄마의 병은 더 심해졌고 나는 그녀가 여러 번 쓰러진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집에 돌아온 후로 엄마의 정신 건강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힘을 썼다. 엄마에게 예쁜 말도 많이 하고 칭찬도 많이 하고, 눈을 맞추고 대화하고 웃음을 주고받으며 말이다.

결국 이번엔 참지 못하고 버럭해 버렸지만 이제부터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바로바로 표현하기로 다짐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날 바로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사실 편지라기보다 쪽지에 가까운 짧은 글이었지만.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어제 버럭 해서 너무 죄송해요... 내가 그날 좀 피곤했나 봐, 그냥 잘 들었으면 되는데 이상하게 어제는 그게....

(중략)

편지를 쓰며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한참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때 결혼한 친구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너는 그래도 좋겠다, 남편도 있고. 안 외로울 거 아냐"

"야, 말도 마. 있어도 외로워. 아니, 있으니까 더 외로워"

친구는 혼자서 외로운 게 둘이 있어서 외로운 것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엄마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남편도 자식도 곁에 있지만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로운 마음.

나는 고이 접은 쪽지를 엄마의 침대맡에 두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식탁에는 예쁘게 담긴 도시락 통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출근길에 먹어’.

무심한 듯 시크한 쪽지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야채김밥이었다. 그녀는 퇴근 후 밤늦게까지 김밥을 싸고 잠든 것이 분명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근길 차에서 눈물 젖은 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다짐했다. ‘이제는 엄마의 불행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지. 그녀의 행복이 내 행복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지 ‘ 누군가 그랬다. 도망친 자에게 천국은 없다고. 힘들어도 괴로워도 가족과 함께 있는 이곳이 나에게는 천국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