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전 남친과의 재회
그 시절 나는 꽤 움츠려 있었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늘 남들과 나를 비교했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한창 실의에 빠져있을 때다. 친구가 술이나 한잔 하자고 부른 자리에 그가 있었다.
누가 봐도 곱게 자란 부잣집 아들. 술자리에 끌고 나온 비까 번쩍한 차하며 걸치고 있는 옷, 고가의 시계까지. 나는 처음부터 그가 별로였다.
‘보나 마나 부모 잘 만나서 편하게 사는 얘겠지’
되려 쌀쌀맞게 굴었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나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 싫었다. 운 좋아서 부모 잘 만난 걸 자기 능력인 줄 알고 으스대는 사람들.
이별과 더불어 상실의 마음이 비뚤어진 세계관과 콜라보를 이루며 열등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다. 그래서 더 의식적으로 피했다.
'친해질 필요 없잖아. 애초에 다른 사람은'
“조심히 들어가고”
모두 헤어지고 택시를 잡고 있을 때다.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그였다.
“집이 어디야? 데려다줄게”
“아니야. 가까워. 택시 타고 가면 돼”
“00 근처 맞지? 아까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오늘 금요일이라 어차피 택시 안 잡혀”
아니나 다를까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택시는 한동안 잡히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대리기사님께 죄송해 못 이기는 척 탔다.
함께 탄 차에서 어색함이 감돌았다. 나는 내내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그는 앞에 앉아 말이 없었다. 간혹 자동차의 좌회전 깜빡이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그가 분위기를 풀려 억지로 떠들지 않아 좋았다. 자동차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여기서 내려 주면 돼.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근데 번호 좀 알려 줄래?”
“.....?”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한국 온 지 얼마 안 돼서 친구가 없어. 친구 하자. 동네 친구”
단단히 잠근 마음 안으로 훅하고 들어오는 그를 미처 쳐낼 여력이 없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누군가 필요했다. 부모도 친구도 연인도.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기에.
그는 통통 튀는 내가 좋다고 했다. 혼자 있을 때면 한없이 가라앉는 내 모습이 싫어 일부러 밖에서는 유쾌하고 밝은 척하던 나였 건만.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티가 났다. 어디 하나 꼬인 게 없었다. 매사에 삐뚠 나와 달리 남을 의심하거나 말을 곡해해서 듣지 않았다.
'쳇, 왜 저렇게 밝은 거야'
만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가 끌고 오는 부담스러운 차하며 비싼 레스토랑이며 한 번쯤 내가 계산을 하려고 해도 부담스러운 가격에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오늘 떡볶이 먹자. 나 잘 가는 데 있어."
가끔 일부러 단골 집을 데이트 코스에 넣었지만 이마저 즐겁지만은 않았다. 괜히 티 내는 건가 싶기도 하고 갈 때마다 차델 곳이 없어서 한참을 빙빙 돌아야 하는 것도 불편했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내려올게”
자주 이야기하던, 그가 키우는 강아지를 보여 주겠다며 집으로 올라갔을 때다.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1층 입구에 젊고 덩치 큰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2층에는 회원권이 몇 천만 원이나 한다는 피트니트센터가 있었다. 구경하러 들어가기에도 부담스러운 고급 편집샵과 뷰티숍도.
잠시 뒤 그가 왔다. 비숑말고 한 사람을 더 데리고.
“어머, 네가 로운이구나. 현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반가워. 내가 현이 엄마야”
“어.. 앗.. 아, 안녕하세요. ”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눈짓을 주자 그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마침 운동가는 길에 같이 내려왔어. 친구랑 같이 왔다고 하길래. 놀란 거 아니지?
“아... 네 아니에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들은 대로 미인이시네요”
“어머, 호호홍 고마워. 너도 듣던 대로 참 예쁘다.
"엄마, 저희 이제 가야 해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서둘러 말을 잘랐다.
"알았어- 얘는 참, 그럼 둘이 좋은 시간 보내렴. 다음에는 집으로 놀러 와”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제대로 말을 한 건지. 늘 내가 모자란 게 들킬까 전전긍긍했는데, 원망은 꼭 이런 곳에서 터져 나왔다.
“말이라도 좀 해주지! 나 이렇게 뵙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 별 뜻 없어. 그냥 정말 네가 궁금해서 나온 거야”
“.... 됐어”
이상하게 심술이 났다.
작고 여리여리한 체구. 어딘가 모르게 단단해 보이는 외모. 고급스럽게 묶어 올린 머리와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중년 여배우가 떠올랐다. 극에서 가난한데 씩씩하기만 한 여자친구를 떼어놓는.
집에 돌아와서도 그의 어머니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분명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집에 가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던 중 그가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바빠졌다. 나도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간을 내는 게 쉽지 않았다. 나도 그도 점점 짜증이 늘었다. 조금씩 소원해지는 그를 보며 ‘일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 보다’ 싶다가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격지심이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서 쉬고 있는데 그가 말도 없이 집 앞으로 찾아왔다. 이상하게 또 화가 났다. 지랄 맞은 상사한테 종일 털려서 몸살까지 날 지경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우리 동네에 오는 게 싫었다. 보여주기 싫은 우리 집. 30년이 넘어가는 오래되어 색이 바랜 빨간 벽돌집.
"말하고 오지. 나 오늘 컨디션 별론데"
“일부러 왔는데 왜 그래. 보고 싶어서 왔어. 나도 오늘 너무 힘들었거든.”
“... 그럴 거면 그냥 쉬지 그랬어. 그만 가서 쉬어.”
“하아... 그래. 컨디션 좋을 때 보자. 나도 오늘 지치네”
맥락 없는 짜증에 그도 질렸겠지.
바빠진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고 그와 헤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드는 열등감이 지겨워서, 그를 볼 때마다 돈 많은 그의 부모님이 오버랩 돼서,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자기 예언적 확신이 싫어서, 작아지는 나를 보느니 그를 보지 않는 게 낫겠다 싶어서.
얼마 뒤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도 시간을 갖는 게 좋겠다고 했다. 붙잡지 않는 그가 되려 섭섭했지만 도리가 없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렇게 한 달 두 달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