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후 브런치 카페 시점으로 다시 돌아와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생각에 빠져있던 나를 그가 깨웠다.
"으, 응? 아니야. 우리 무슨 이야기했었지?"
"너 많이 변했다고. 훨씬 좋아 보여. 밝고"
"그래? 내가?”
“응, 느낌이 많이 달라졌어. 전에는 무서웠는데"
"에이, 무슨 말이야"
"진짜야. 무서웠다고, 너.
"진짜구나? 나 그랬어? 나 그렇게 별로였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하하. 그냥 좀 나한테만 못 댔던 건가. 무슨 일이 있었어?”
“나? 별일 없었어. 그냥 즐겁게 살았어.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음.. 그리고 연애를 끊었지. 하하”
“에이, 진짜로”
“정말이야, 누군가를 안 만나니까 좋더라. 나를 좀 돌아보게 됐달까. 그때는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았나 봐”
“이번 주말에는 뭐 해?”
“이번 주..? 일이 있어”
“무슨 일?”
“그냥 약속. 뭐야, 그런 것도 묻는 사람이었어?”
“궁금해서”
...
둘 다 브런치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커피만 홀짝였을 뿐. 그도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나는 이만 일어나고 싶었다. 말이 더 길어지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만 같아서. 아니, 무언가 기대할 것만 같아서. 어쩌면 나조차.
“데려다줄게”
“응. 고마워”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예의 상 하는 거절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잠시 뒤 그의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집 앞에 섰다. 그는 아직도 우리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나를 배웅했다.
“뭐 하러 내려”
“그냥”
“조심히 들어가”
“응, 즐거웠어. 연락할게”
“연락은 무슨, 운전 조심해”
3일 정도 지났을까. 그에게 연락이 왔다. 야근을 마치고 막 집에 왔을 때였다.
“바쁘지?”
“응, 그럴 때라. 넌?”
“난 한가해. 저녁은?”
“아니, 아직”
“저녁 할래? 마침 근처인데”
얼굴도 엉망이고 차림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역시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빙빙 돌리지 않은 그의 말투가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고 이제 거절은 정말 싫으니까. 싫다고 해놓고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뛰었다.
이 나이쯤 되면 설렘을 경계하게 된다. 또다시 상처받고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맞는지 틀린지, 진심인지 아닌지 경중을 따져보고 맞으면 고, 아니면 스탑. 30대 정도 되면 으레 하게 되는 감정의 대차대조표.
조금 뒤 그가 왔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있어.
"좋다. 뭐?"
"순댓국. 나 순댓국 먹고 싶어”
“가자. 잘 아는 데 있어.”
그가 자주 간다는 집.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나는 몸이 허하거나 고기가 당기면 으레 순댓국을 먹었다. 마치 보약 먹듯. 뽀얀 국물에 파를 적당히 넣고 들깨 가루를 왕창 쳐서 먹으면 하루 피로가 싹 가셨다.
“사장님, 여기 두 그릇이요. 맥주?”
“응. 근데 너랑 순댓국은 처음 먹어봐. 좀 이상하다”
“뭐가 이상해. 나 자주 먹어. 근데 예전에는 왜 이런 데를 안 왔지”
“왜긴, 그때는 네가 왕자님이었잖아”
“하하. 왕자님은 무슨. 닭살 돋는다”
“진짜야. 프린세스”
"참나, 그래서 찼구나?"
"음... 아마도?"
"하하. 이젠 이런 소리도 막 하네"
마침 순댓국이 나왔다.
'뽕!'
맥주도 따고, 그에게 맥주도 따라주었다.
'꼴꼴 꼴' 맥주 따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캬아- 시원하다!"
"으악, 시원해!"
"어때? 순댓국은 맛이 괜찮아?”
“응, 맛있어”
조용히 신이 났다. 그땐 이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알 수 없는 인생, 알 수 없는 미래. 예전에는 모든 게 깜깜하게만 느껴졌는데. 시간의 힘인가, 지금은 안개가 조금 걷힌 기분이다.
우리는 국을 말끔히 비워냈다. 맥주도 말끔하게.
막 계산을 마치고 나왔을 때 그가 말했다.
“한잔 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