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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남자친구의 장점

by 새로운




그는 전보다 훨씬 섬세해졌다.



모든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할까. 모든 게 척하면 딱이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여자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여자가 반하는 포인트도 정확했다. 때로는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느 날은 불쑥 회사 앞으로 찾아와 나를 놀라게 하고 어떤 날은 점심시간에 맞춰 와 점심을 먹고 갔다. 서프라이즈와 부담의 경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싫어할 것 같은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싸울 일도 없었다. 행여나 그런 상황이 오면 내 표정을 먼저 읽고 사과부터 했다. 결국 헛웃음이 나서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



30대 후반의 여자가 ‘싫다’고 하는 건 ‘한 번 더 물어봐 줄래?’가 아니라 정말 ‘싫다’는 거다.



덕분에 쓸데없는 줄다리기에 에너지를 낭비할 일도, 의미 없는 기싸움에 진이 빠질 일도, 그 흔한 밀당도 없었다. 그는 마치 나에게 있는 그대로를 다 보여주는 것처럼 행동했다. 투명하고 명쾌하게.




집에 데려다 줄 때는 내가 들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에서 내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날 기다릴 때도 비슷했다. 매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을 활짝 펼치고 서 있었다. 180cm가 훌쩍 넘는 그의 품에 와락 안길 때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그의 전처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게 다 그녀 덕분인가 싶어서. 어딘가 어설프고 뚝딱대던 사람을, 마음은 크지만 서툴고 자존심만 세던 사람을,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다듬어 준 게 그녀인가 싶어서.




“뭐 하러 사무실에서 여기까지 와? 점심시간 고작 한 시간인데"

"너 밥 잘 안 챙겨 먹잖아"

"잘 먹어. 그리고 다이어트 중이야"

"뺄 살이 어디 있다고"

"그럼 빨리 먹고 가자. 차 막혀"

"차가 뭐 대수인가. 천천히 가면 돼. 나한테는 이게 더 중요해"




싫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런 비현실적은 연애는 20대 이후로 없다고 생각했다. 30대를 지나며 사랑은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에 가깝다고 여겼는데. 결혼이 현실이니까 사랑도 그게 맞다며 합리화했는데. 이것저것 따지게 되는 나를, 상대를, 원래 이 바닥은 다 그런 거라며 자조했는데.



우리는 일주일에 2-3번은 만나 밥을 먹었고 주말이면 근교 데이트도 했다. 길거리 음식도 사 먹고 양평에서 핫도그도 사 먹었다. 가끔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노상 데이트도 즐겼다.




그는 성수동에 커다란 카페 하나, 큰 식당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매장 관리는 그의 동업자 친구가 하고 있었고 그는 주로 자금과 운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자유롭게 썼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왔고 조금이라도 나를 기다리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동안 나 같은 직장인만 만났던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지인과 있을 때 부르기도 하고 친구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하는 등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어울렸다. 여전히 고급 세단을 끌고 나오는 그의 친구들이 불편했지만 예전처럼 이질감이 들진 않았다.




“혹시 이번 주말에 바빠?”

내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그가 물었다.

“주말? 별일 없어. 왜?”

“엄마 생신인데. 올래?”


“어머님 생신에?”

“응. 편하게 생각해. 너 자랑하고 싶어서. 나 한국 들어오고 걱정만 하셔.”

“…”

“부담 갖지 말고. 한 번 생각해 봐. ”

“응, 생각해 볼게”






‘날 탐탁지 않아 하시면 어떻게 하지...?’



예전의 나라면 분명 이런 생각을 했을 거다. 스스로를 항상 평가당하는 자리에 두었다. 그래서 남의 시선에 더 취약했다. 그 시선들은 대체로 뾰족하고 아팠다.



그러니 남들도 쉽게 판단했다. 겉모습만 보고 추정하거나 ‘이럴 거야 저럴 거야’ 짐작하고 선입견을 들이댔다. 나보다 못한 것 같은 사람들은 속으로 쉽게 무시했다. 우월함은 열등감의 다른 말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궁금했다. 그의 세계는 어떨까? 내가 상상한 그 모습일까? 그 시절 나를 그토록 작게 만들었던, 자격지심 때문에 사랑마저 도망가버리게 만들었던.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사진 : 드라마 '마이데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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