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너무 오랜만이에요. 와줘서 고마워요”
“네, 오랜만에 봬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예전과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다. 지나온 세월이 무색할 만큼. 나는 오는 길에 산 꽃을 건넸다.
“생신 축하드려요”
“어머~ 뭐 이런 걸 다. 너무 예쁘다. 고마워요. 여기가 현이 아빠. 여보“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그냥 밥 먹고 간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다 가요”
“네” (싱긋)
아버님은 상상했던 모습과 비슷했다. 다소 무표정했지만 센스 있고 귀티가 났다. 새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옆으로 빗어 넘긴 중년 남자. 배도 나오지 않았고 허리도 꼿꼿하다. 네이비 폴로셔츠를 팬츠 안에 단정하게 집어넣고 카멜색 드라이빙 슈즈를 신은.
우리는 압구정의 한 중식당에서 만났다. 커다란 룸에 우리만 있었다. 직원들이 분주하게 오갔고 맛있는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는 멀리 있는 음식을 열심히 덜어주었다.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둘이 친구 결혼식에서 다시 만났다고요?” 어머니가 물었다.
“네”
“어머~ 이게 무슨 우연이야. 너무 신기하네”
“근데 결혼 생각… 없어요…?”
“엄마, 무슨 결혼이에요" 그가 말을 막았다.
"아직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아서요"
나는 억지로 웃었다. '그런 게 궁금해서 부르셨구나. 하긴' 애써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그 외에도 많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직장은 어떤지, 뭘 좋아하는지 등등.
“엄마, 그만 물어봐요. 밥을 못 먹겠네. 어서 식사하세요”
“어머, 미안 미안. 어서 들어요”
“근데 우리 현이 갔다 온 게 신경 쓰이진 않아요?”
“엄마...!” 그가 엄마를 쏘아보았다.
"네. 그럼요. 이제 막 만났는데요”
“불편했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가 말했다.
“아니, 근데 어머님이 궁금한 게 많으시더라"
"엄마가 자기한테 관심이 많아"
"근데 자기는 왜 그렇게 말을 안 해?”
“나 원래 말 잘 안 해”
“나랑 있을 때는 잘하면서. 아버님이랑은 한 마디도 안 했어”
"그랬나...? 아빠랑은 별로 안 친해"
"…? ”
더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가족 이야기는 민감한 주제니까.
커피를 한 잔 더 할까 하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고마워. 푹 쉬어”
“응, 운전 조심해"
고됐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마음이 후련했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깊은 체기가 내려간 느낌. 문득 그의 아버지가 신경 쓰였다.
'엄청 하하 호호하는 분위기 일 줄 알았더니...'
그 후 나는 성수동으로 갈 일이 잦아졌다. 그가 레스토랑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하면서 전처럼 시간을 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가 일을 하고 있을 때면 나는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청량한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주로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근처 아기자기한 숍들을 구경했다. 평소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나는 그를 기다리는 핑계로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가끔 그가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혼자 갔다. 물론 그의 연인이라는 티는 내지 않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괜히 그랬다.
그곳에서 일하는 어린 아르바이트생들을 보면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대학생 때 꽤 오래 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의 한 카페. 지금은 흔한 와플을 그때는 압구정에서도 그곳에서만 팔았다. 그래서 와플을 먹으러 손님들이 많이 왔다. 그중에는 유명 인사나 연예인도 많았다. TV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스무 살의 난 그곳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당시 압구정은 지금의 청담동과도 같은, 아니 그보다 더 한 패피들의 성지이자 부자들의 놀이터였다. 보이지 않는 커다랗고 높은 담벼락이 둘러 쌓여 있는 듯, 영화 <트루먼 쇼>의 세트장 같은. 그곳에서 일할 때면 아르바이트생 1을 연기하는 배우 지망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을 위해 커피를 내리고 와플을 굽는. 시급 3500원을 받으면서.
한 번은 매장에 까무잡잡하고 통통한 여자가 한 무리의 친구들과 들어왔다. 들어왔을 때부터 시끌벅적했다. 무리 중에는 누구나 알 법한 남자 연예인도 한 명 있었다.
그들은 내내 카페가 떠나갈 듯한 큰 목소리로, 영어를 섞어가며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그 통통한 여자가 테이블 위에 있던 설탕통을 와락 엎었다. 나는 서둘러 설탕을 빗자루로 치웠다.
설탕을 치우는 나를 보고도 그녀는 미안한 기색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테이블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그녀는 말을 이어갔고 결국 혼자 흥분해서 테이블 밑에 있던 나를 발로 찼다. 빨간색 플랫슈즈로.
“웁스, 쏘리!”
“앗, 괜...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람에게 예민해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