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바에 혼자가 나아
그가 계속 바빠지면서 나는 그를 기다리는 게 일이 되었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요즘 정신이 없다”
기다린 지 2시간쯤 지났을까 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냐, 괜찮아. 일은 다 봤어?”
“... 사실 그래서 왔는데... 오늘 영화 못 보겠다. 미안해. 업자가 마감을 엉망으로 해놔서 지금 다시 불렀어”
오늘은 그와 영화를 보려던 참이었다. 그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마블의 신작.
“... 정말? 어쩔 수 없지 뭐… 어서 가”
“너무 미안해. 근처에 레지던스 잡아줄게 좀만 기다릴래? 2-3시간 정도면 끝날 거야”
“아냐, 오늘은 그만 갈게. 나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마무리되면 전화하고 “
“그럼 잠깐만, 택시 잡아줄게”
“아냐, 걷다가 지하철 타지 뭐. 알아서 갈게 걱정하지 마”
이럴 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걱정하라’는 의미다. 하지만 정말 그냥 걷고 싶기도 했다.
날이 좋았으니. 생각이 많았으니. 데려다주겠다는 그에게 애써 괜찮다고 말한 채 커피숍을 나왔다.
그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 바쁜 와중에도 보고 싶어서 오라고 한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머리와 마음은 늘 따로 노는 법. 속으로는 백번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속상한 걸 어쩌겠는가.
정신없이 바쁜데 능력이 뛰어난 남자와 시간은 많은데 능력이 부족한 남자, 둘 중에 한 명을 택하라면 누가 더 좋을까?
어렸을 때라면 당연히 후자였을 것이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잘난 남자들은 대체로 자기가 잘난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장은 아니라고 해도 시간 차일뿐 결국은 알게 되는 것이다.
그 후 그는 더 더 바빠졌다.
간혹 나와 만날 때도 내내 통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나가서 통화를 할 때면 나는 덩그러니 혼남아 민망해지곤 했다.
그의 체인점과 세 번째 레스토랑이 오픈을 앞둔 지 얼마 안 되는 시점, 그날도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때쯤 그가 또 가야 한다고 했다.
“자기야, 밥 먹고 있어. 나 사무실 잠깐만 갔다 올게”
기다리는 일에 슬슬 지치기 시작했을 때였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를 홀로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회사원이 최고야. 사업하는 사람 좋을 거 하나 없어. 네 아빠 봐라. 그놈의 사업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죽어라 하고. 어휴, 지겨워’
아빠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사촌 형의 소개로 겨우 작은 전선 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마를 만났다.
오빠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는 사업을 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무작정 사표를 쓰고 와서 말릴 틈도 없었다고. 얼마 간 잘 되는 듯싶다가 공장에 큰 사고가 나면서 거액의 합의금을 물어줘야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빚을 갚느라 뼈 빠지게 일했다. 그러니 엄마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돌아오지 않는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사무실로 가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불안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레스토랑과 커피숍에 가서 사장님이 왔냐고 물었지만 직원들은 못 봤다고 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 우선은 집으로 왔다.
잠시 뒤 그에게 연락이 왔다. 인테리어 작업을 하던 외주업체 직원이 크게 다쳐 병원에 왔다고 했다. 휴대폰을 차에 둬서 바로 연락하지 못했다고... 나는 그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문자라도 남길 수 있는 거잖아.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 안 해?”
“진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니 요즘 왜 그래 정말... 바쁜 건 알겠는데 자기 때문에 요즘 나도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미안해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알았으니까 그만 쉬어. 끊을게 “
그는 일에 있어선 똑 부러지고 결단력 있는 사람인 것 같다가도 나와 관련된 모든 일에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했다.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는 것은 물론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면 될 걸 상대가 지칠 때까지 질질 끌어 결국 화를 돋웠다.
미움받을 용기가 부족한 건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건지, 얼마 전 그가 '나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다신 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간절한 마음은 오히려 관계를 그르치곤 한다.
그가 그럴 때면 오히려 혼자인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때문에 바쁜 사람이 안쓰럽다가도 이렇게 신경 쓰느니 차라리 혼자가 더 낫겠다고.
하루는 참다못한 드디어 쏟아붓고 말았다. 내 딴에는 그를 신경 쓰게 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친구와 약속을 잡은 후였다.
“그니까 이번 주에는 못 보는 거야?”
“응, 친구가 이사 갈 집 좀 같이 봐달라고 해서”
“… 주말은 우리 겨우 보는 날인데...”
“자기도 이번 주는 일 봐요. 나 때문에 일 못 하잖아”
“아닌데.. 암튼 알겠어... 근데 보고 싶은데..”
내 마음도 모르고 그가 아이처럼 칭얼댔다.
”다음 주에 두 번 봐요”
나는 마음을 누르고 말했다.
“… 그래도 우리 일주일에 한 번은 봐야 하는데...”
“... 휴우... 현아, 솔직히 요즘 나도 좀 힘들어. 내가 맨날 자기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잖아. 나도 일이란 게 있는데. 나 만나면 하루 종일 자기 기다리는 게 일이야. 그건 생각 안 해봤어? “
"... 미안해. 몰랐어..."
“오늘은 그만하자. 나중에 이야기해요”
“미안해....”
“아니야, 내일 전화해”
예전 같지 않은 그가 당황스러웠다. 원래 이런 사람인지, 단순히 상황 탓인 건지. 머릿속에 부정적이 생각들이 들끓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왜 저렇게 이기적으로 구는 걸까? 왜 저렇게 애처럼 구는 걸까…?
남자만 보고 사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누군가의 등만 바라보고 사느니 차라리 혼자가 나았다. 죽어라 고생하며 사는 것도 싫지만 남이 싼 x을 치우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엄마의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만 믿고 살아온, 뒤 돌아보니 애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고되고 텅 빈 삶.
그동안 연애가 힘들었던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사랑도 애정도 헤어져도 딱 아프지 않을 정도만.
휴우, 이래서 사랑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