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몇 번 쏟아낸 후 그도 노력하는 듯했다.
나도 그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제 그도 나를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하진 않았다. 대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만났다. 만나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그게 서로에게 더 좋았다. 사랑만큼 시간도 소중하니까.
나이 든 자의 연애란 이런 것이다. 타오르는 감정을 장풍 쏘듯 한꺼번에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내 뜨거운 감정이 오히려 상대의 불씨를 꺼뜨리지는 않는지 부단하게 살피고 조심하는 것.
어느새 우리에겐 사랑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아졌고 그만큼 잃을 것도 많았다. 이별이 헤픈 건 20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이다.
그즈음 그의 사업도 다행히 안정화를 찾았다. 다행히 3번째 레스토랑도 무사히 오픈했다. 우리에게 지옥 같던 시기도 끝이 났다.
“우리 오늘 홍천 갈까?” 토요일 오전 함께 파스타를 먹던 그가 말했다.
“응? 오늘?”
“응. 지금 가면 늦지 않게 도착할 것 같은데. 그동안 너무 바빠서 못 갔잖아. 가자”
“그래, 가자”
우리는 종종 홍천으로 놀러 가곤 했다.
그곳에는 그가 회원권을 가진 리조트가 있었다. 정확히는 가족 회원권이라고 했는데 그도 언제든 쓸 수 있는 듯 보였다. 나중에 친구 말을 들어보니 연권 회원권이용료가 1억이 넘는 곳이라고 했다. 평소에도 숙박비가 50만 원이 훌쩍 넘는 곳.
골프장이 달린 리조트였다. 친구들과 가던 콘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조용하고 프라이빗했다. 그는 혼자서도 이곳에 종종 온다고 했다. 마음이 답답하고 생각하게 많으면 혼자 있다 간다고.
나는 덕분에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건 이곳의 일출 때문이었다. 커다란 통유리 창으로 아침 해가 떠오를 때의 장관이란. 해갈 뜰 때 저 멀리 골프장 끝자락은 마치 지평선처럼 보였다. 때로는 잔디들이 넘실거리는 바다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아침 일찍 눈을 떴다. 그리고 홀로 한참동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반대로 그는 해에는 심드렁했다. 늦게까지 코를 골며 자거나 일어나자마자 업무를 확인했다. 전날 마신 와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날도 우리는 전 날 와인을 잔뜩 마시고 잠에 들었다. 나는 평소처럼 일찍 눈을 떠 해를 보고 있었다. 그때 그가 조용히 뒤에서 다가왔다.
“... 잘 잤어?”
“응, 일찍 일어났네? 이것 봐, 예쁘지” 나는 노랗게 물든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응. 예쁘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가 내린 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이 좋았다.
"와아, 너무 행복해. 이게 얼마만이야"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맞아,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나도 그의 얼굴을 감싸며 대답했다.
“참, 근데 있잖아...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커피를 홀짝이던 그가 말했다.
“응, 뭐?”
“나…. 돈 좀 빌려 줄 수 있어?”
“푸흐훕, 뭐?!"
나는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