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고마워,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
한 달 후에 바로 갚을게”
그는 그날이 1호점 정산 날이라면서, 날짜까지 정확히 정해주었다. 나야 그의 사업 스케줄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저 믿기로 했다.
내 통장에는 돈이 있었다. 비상금 2천만 원. 부모님이 갑자기 아프시거나 사고나 났을 때를 대비해서 따로 떼놓은 돈. 평소 좋아하는 유튜버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그는 통장을 쪼개 두어야 한다고 했다. 월급 통장, 고정비용 통장, 지출 통장, 그리고 비상금 통장.
10년 가까이 되는 직장생활 동안 모아 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큰돈은 얼마 전 집을 사는데 모두 쏟아부었다. 그 후 2000만 원을 남겨 비상금 통장에 넣었다. 월급에서 생활비로 쓰고 남는 돈은 주식을 샀다. 그것이 내 유일한 재테크였고 비상금 통장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 내가 그에게 돈을 빌려주기 위해 이 돈을 건드렸다. 머리가 더 복잡해진 건, 오히려 돈을 빌려준 후다. 과연 그가 갚을지 혹시나 이 사람이 사기꾼은 아닐지 오히려 걱정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간혹 '혹시 돈을 안 갚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지웠다.
나는 그의 매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부모님도 만났다. 게다가 그는 내 친구의 동창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돈을 송금한 후에도 의구심은 더 커졌다.
‘사업한다는 사람이 천만 원이 급해서 여자친구에게 빌리는 게 과연 맞는 건가....?'
다행히 돈을 빌린 후에도 그는 변함없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돈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처럼 만나자마자 울상이거나 걱정만 우르르 쏟아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는 다시 예전의 그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가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한 달이 되는 날.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처럼 연락했지만 돈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보통이라면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야 한다. 오늘 줄 수 있다, 없다. 만약 못 준다면 언제까지 주겠다 하는 말들 말이다.
나는 초조해졌다. 하지만 며칠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래도 남자친구인데 다짜고짜 돈 갚으라고 할 순 없었기에. 이럴 때도 왜 체면을 차리게 되는지…‘너무 바빠서 잊어버렸거나 사정이 있겠지… '라며 애써 나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아무리 바빠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해 주는 게 맞지 않나?' 등의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불안과 분노, 조급함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사실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던 건지, 그때의 내가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 뱅킹 알람을 켜두고 수시로 입출금 내역을 확인해 봤지만 역시 아무런 내역이 없었다.
며칠간 끙끙 앓던 나는 드디어 그에게 말을 꺼냈다.
'자기야, 혹시 내 돈 언제 줄 수 있어?
엄마가 그 돈 찾으셔'
저 말을 생각해 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뻔한 핑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내 돈 내놔, 이 자식아!'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마저 최대한 예의를 차린 것이었다.
조금 뒤 그에게 답장이 왔다.
'맞다! 미안해. 내가 먼저 챙겼어야 하는데... 너무 미안한데 2주 안에 꼭 돌려줄게”
'맞다…?!‘
순간 분노가 치밀었지만 금세 안도가 되었다. ‘그래도 알고는 있네…'
우연인지 뭔지 2주 동안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