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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by 새로운





“자기야, 나 돈 좀 빌려줘”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한 건 아니다. 그건 당시의 충격과 기억의 왜곡일 뿐, 처음에는 잔잔한 불평에서 시작되었다.



"이번에 매장 내면서 업체 당장 줄 돈이 부족하네, 걱정이야"

"정말? 그렇겠다. 거기 월세도 비싸지 않아?"

"응. 깎았는데 건데 그래도 비싸"



그가 새롭게 매장을 낸 곳은 새로 생긴 영화관 근처였다. 새 빌딩이었고 자리도 좋았다.



"월세가 얼마야?"

"580"

"비싼 거지?"

"응 원래 600 달라는 거 깎은 거야"


언제부턴가 돈 이야기만 했다. 대부분 당장 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여기는 이래서 부족하고, 저 부분은 어디가 모자라고, 회사가 얼마나 어렵고 등등.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나도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돈 걱정은 계속 됐다. 울상을 하고 있어서 혹시나 해서 물어보면 역시나였다. 처음부터 인건비를 너무 많이 책정했다는 둥, 요즘 재료비가 너무 비싸다는 둥... 그런 그를 보고 있는 것도 점점 한계에 도달했다.




"부모님께 부탁드려 보는 건...?"

"으으, 싫어. 생각만 해도 토나와..."

"왜..?"

"전에도 몇 번 빌렸는데 그때부터 엄마 매일 같이 매장에 나오셨어. 경영에도 참견하고 난리도 아니야. 정말 싫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설마 나에게 빌려달라는 말인가...?'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쉽게 돈을 빌려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아빠가 작은 아빠 보증을 잘못 서서 몇 년을 고생하는 걸 보았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받은 역사가 없다. 차라리 주면 줬지 지인끼리 돈거래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달리 그는 돈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날도 만나자마자 돈 이야기부터 꺼냈다.



"휴우... 돈이 너무 안 돌아..."

"장사가 잘 안 돼...?"

“아니, 그건 아닌데.. “



그의 가게는 장사가 안 되는 것 같지 않았다. 난 성수동에 갈 때마다 일부러 그의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장사가 잘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가게를 보고 있으면 왠지, 안심이 됐다. 어딘가 모를 우쭐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날마다 조금 다르긴 했지만 카페도 레스토랑도 모두 사람으로 붐볐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후기도 점점 많아졌다. 아르바이트생들은 늘 분주하게 오갔다.



"근데 왜...?"

"이번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인테리어비도 생각보다 많이 들었고, 오픈도 너무 늦어져서. 휴..."



‘도대체 그런 말을 나한테 왜 하는 건지…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그가 돈타령을 할 때마다 목까지 이런 생각이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어쨌든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내 인내심도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상대의 불평만 들어야 할 땐 그야말로 진이 빠진다.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다.



‘아니, 그렇게 사업을 많이 해본 사람이 좀 알아서 잘할 것이지, 이렇게 매번 여자친구 앞에서 감정을 전염시키는 게 맞나...?’ 싶다가도 걱정이 되고 불쌍하기도 했다. 지난번 가족 식사에서 느꼈던 냉랭한 분위기도 그렇고 한국에 돌아와 고군분투하는 그가 더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어쨌든 이혼이란 아픈 것일 테고, 가족들과도 그렇게 친밀하지 않은 것 같으니 어디에다가도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하겠지 싶었다. 마치 지난 시절의 나처럼. 혼자였을 때의 나처럼.



결국,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좀 빌려줘...?"

"그래줄 수 있어? 한 달이면 돼"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얼마나...?"

"한... 천만 원?"

‘히익, 처, 천만 원...?’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나 많이...?"

"음... 아니야, 휴우. 내가 무슨 말을. 신경 쓰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사업하는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런 건가...?’



좋은 사람은 상대로 하여금 생각이 많아지게 만들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라며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는 며칠 뒤 그에게 천만 원을 송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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