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전 남친입니다
밥만 먹고 헤어지려던 우리는 결국 근처 술집으로 갔다.
그는 화요, 나는 에비수를 시켰다.
“...나 그때 너 진짜 좋아했는데”
“풉”
“정말이야. 헤어지자는 말에 그냥 물러섰지만. 많이 힘들었다”
“… 뭐 이제 와서 그런, 참나”
“왜 그랬어?”
“글쎄. 왜 그랬을까...?”
“나 한 번도 까여본 적 없는데”
“와, 내가 최초네, 영광이다 큭큭”
“재미없거든”
“에이, 근데 마지막 아니지, 와이프 있잖아”
“… 참나. 안 웃겨, 그리고 내가 깬 거거든?”
“큭, 그래 그래. 잘했다. 에이 주제 바꿀래"
“맞아. 재미없다. 이런 이야긴"
…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어? 나 때문에?”
“응.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아픈 법이야”
나는 그의 배경에 괴로웠고 그는 부족한 사랑 때문에 힘들었다. 그에게 절실했던 건 사랑이었고 나에겐... 나에게 뭐였을까?
열등감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근데 밝아졌어, 너” 그가 말했다.
“응?”
“너 말이야. 말했잖아. 예전하고 많아 달라졌어. 주현이 결혼식에서부터 느꼈어”
“자꾸 말하는 거 보니까 정말인가 보네.”
“음... 뭐라고 할까. 훨씬 밝아 보여. 에너지가 좋아”
“전에는?”
“까칠했지. 심술이 가득해서. 미간만 잔뜩 찌푸리고”
“뭐야, 내가 언제?”
“하하. 너. 나한테 맨날 화만내고. 나 항상 졸아있었다고”
“내가 엄청 못 댔었나 봐”
“착했는데, 못됐지”
그는 미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전처와 결혼하게 된 계기, 그리고 헤어지게 된 과정까지. 그는 와이프와 말끔하게 정리했다고 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글로벌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내가 매일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는 그 어플을 만든 회사.
“애가 없느니 깔끔해. 돈도 따로 관리했고”
‘굳이 이런 말을 왜 할까…?’
마음이 서걱댔지만 그냥 두었다.
“그래서 와이프는 미국에 있어?"
“응. 원래 거의 거기 사람이니까."
"왜 헤어진 거야...?"
"글쎄, 이제는 이유도 잘 모르겠어. 그냥 언제부턴가 하루하루가 지옥이더라."
'지옥이라...'
언젠가 인생이 천국이었 적이 있었던가.
“힘들었겠다”
“덕분에 많이 배웠지 뭐 “
“고생했네"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줘. 이혼남은 상처에 취약하다"
“하하. 넉살이 늘었네"
알딸딸했다.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술맛을 조금 알 것 같다.
한편으로 마음이 편했다. 나는 얼마 전부터 결혼할 생각이 쏙 사라졌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그가 갑자기 나타났다. 예전보다 훨씬 더 멋진 모습으로, 돌싱이 되어.
‘그래, 차라리 갔다 온 게 나을 수도... 아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그나저나 차암, 내 연애사도 다사다난하다…'
그날은 술이 좀 과했다. 2차로 내가 자주 가는 동네 횟집에 갔다. 한 접시 삼만 원짜리 세꼬시를 시키고 청하를 마셨다.
“와아- 취한다”
“그러게 우리 술 많이 늘었다”
시간은 12시가 넘었고 어느덧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을 닫은 가게 앞에 나란히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주었다.
알싸한 담배향이 났다.
텁텁하면서 화한 민트향. 어릴 적 아빠에게 나던.
좋아하는 남자 앞에선 이상하게 아빠가 생각났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마워”
“뭐가?”
“나랑 놀아줘서.”
“뭐야.”
“나 들어와서 좀 막막했거든. 하는 일도 그렇고.”
“너 전에도 나 그렇게 꼬신 거 알지, 한국에 친구 없다고"
“맞아. 아마도 넌 나의 구세주인가 봐. 큭큭”
“근데 그거 알아?"
“뭘?”
“나도 친구 없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길게 나를 응시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당황해서 웃음이 났다.
“선생님, 뭡니까. 이건”
쑥스러울 땐 웃고 만다. 이런 노곤한 분위기가 영 불편하다. 손을 뺄까 잠시 고민했다. 그는 슬쩍 내 손을 가져가 입을 맞췄다.
“좋다. 냄새.”
“나 손 안 씻었는데”
"너는 꼭 그러더라”
취기가 오른 그의 입술이 따뜻했다. 한 없이 부드러웠다.
사진 : SBS 드라마 '마이데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