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친.... 읭?
청승맞은 짝사랑은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며칠은 멍하니 있다가 치킨을 시켜 먹고 곱창을 시켜 먹고 피자를 먹었다. 남자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며 죄 없는 친구에게 화풀이도 해보고 친하지도 않은 친구를 불러내어 술도 마셨다.
20대에나 하던 짓을 이 나이에도 하고 있다니 헛웃음이 났지만 ‘그래도 아직 열정이 있는 건가’ 일말의 희망을 찾기도 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 핑계일 뿐 사실 지나간 청춘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열심히 뛰었지만 결국 눈앞에서 막차를 놓쳐버린 막막한 기분.
실로 오랜만에 감정적으로 정점을 찍어서인지 다시금 연애 생각이 쏙 들어갔다. 내가 여성호르몬이 줄어든 건지 남자들이 남성호르몬이 줄어든 건지 사냥하고 싶은 본능도 사냥당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이제야 젠더 대통합을 이룬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러던 중 우연히 전 남자친구를 마주쳤다. 친구의 결혼식에서였다.
“로운아”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어... 어머, 오, 오랜만이야!”
오래 만나진 않았지만 기억에 선명한 사람. 너무 당황해서 삑사리가 다 났다.
"아이코, 목소리가..."
열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하하, 여전히 웃기다. 너”
신부 대기실에서 나오던 중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결혼식에 가지 않는다. 어차피 이번 생에 결혼은 글렀고 진심으로 축하해 줄 게 아니라면 피차 좋을 게 없다고 합리화해버렸다. 웬만하면 축의만 보내자 스스로와 합의 봤던 참이다.
그래도 친한 친구라 참석했는데 하필 그를 마주칠 줄이야. 그러고 보니 그를 만나게 해 준 사람이 오늘의 신부였다.
“하하, 무튼 진짜 오랜만이다.”
“응. 어떻게 지냈어?”
“나야 뭐 잘 지내지. 넌?”
“나도 뭐“
....
“... 주연이 봤어? 진짜 예쁘더라”
“응응, 아까 인사했어”
“그랬구나... 음... 그럼 식 잘 보고!”
나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친구랑 왔어?”
“아니. 혼자”
“그래? 끝나고 밥이나 먹을래?”
“오늘? 나랑?”
“응 식 끝나고. 혼자 먹는 뷔페는 영 싫더라고. 너도 혼자 왔다면서”
“아..."
"밥만 먹고 가자. 나도 오래 못 있어"
"그럴... 까?"
얼떨결에 그러자고 해버렸다. 우연히 만난 전 남자 친구와 밥이라니. 그의 소식은 간간히 SNS를 통해 알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만나 밥까지 먹게 될 줄이야. 급히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나왔지만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아... 그냥 일이 있다고 할걸. 아니, 그나저나 쟤는 눈치도 없이 갑자기 왜 저래?’
화장식 칸막이에 머리를 찧었다.
'근데 여전히 멋지긴 하네. 더 멀끔해졌어..'
결국 둘이 나란히 사진까지 찍었다. 신부는 나란히 있는 우리를 보고 놀란 듯 눈을 치켜뜨더니 이내 푸식 웃었다.
(뭐야? 너네?)
(아, 몰라!!!)
식이 끝나고 그의 차로 갔다. 오랜만에 나란히 앉은 차 안. 어색한 공기.
....
“미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떻게 알았어?”
“주연이 한테 들었어 “
“아... 다시 들어왔어. 아무래도 나는 한국이 더 좋아”
“러쿠나... 와이프는?”
“와이프?"
"응"
"아... 나 헤어졌어. 그건 못 들었구나? "
"아?! 몰랐어. 미안! 괜히 물어봤다"
"아니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괜찮아"
....
"너는? 결혼했어?"
"나? 난 글렀지 뭐. 푸하"
"하하,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막 좋은 건 아니었지만 막 싫지도 않았다.
잠시 후 우린 브런치 카페로 갔다. 안타깝게도 검색한 곳은 자리가 없었고 결국 그의 집 근처,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로 갔다. 다행히 한적했다. 여느 때처럼 창가 근처로 자리를 잡았다. 자주 앉았던 테이블. 그와 헤어진 이후로는 딱히 올 일이 없었는데. 이곳을 다시 오게 될 줄이야.
토요일 오후. 볕이 좋았다. 통유리 창으로 내리쬐는 볕. 그는 메뉴를 빠르게 훑더니 성큼성큼 계산대로 갔다. 예전처럼 알아서 척척.
"알아서 시켰어. 배부르면 남겨"
"응, 땡큐땡큐"
"아... 잠깐만"
그는 선 채로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계산대로 갔다. 직원과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내 담요를 하나 가지고 왔다. 결혼식이라 신경 써서 입은 원피스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우리는 한동안 커피를 홀짝였다. 서로 별 말이 없었다. 하얀 거품 위에 예쁜 라떼 아트가 그러져 있었다.
"여전히 라떼 좋아하는구나?"
"응. 넌 여전히 '아아'네?"
"맞아."
조금 뒤 나온 브런치. 이 남자, 이번에도 너무 많이 시켰다.
“하는 일은 잘 돼? 예전에 하던 그 일 계속하는 거지?”
내가 먼저 물었다.
“응, 친구랑 하는데 좋아. 재미있어”
“다행이다. 예전에 아버님이랑 일할 때는 힘들어했잖아”
“내가 그랬나?”
“응, 너 그랬어. 일 이야기만 꺼내면 낫빛이 돼서. 몰랐구나?”
“그랬나...?”
그는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전형적인 부잣집 아들이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는. 수제화 장인이던 아버지는 우연히 동업자와 만든 브랜드가 대박이 나며 한 순간 부자가 됐다. 하지만 그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잘 맞지 않는 건지 아버지와 잘 맞지 않는 건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근데 너도 되게 달라졌다”
그가 말했다.
“나? 왜?”
“음.. 뭐랄까. 예전보다 훨씬 밝아졌어.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아”
"아... 그래?"
문득 생각이 났다. 그 시절의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