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났다.
한동안 마음대로, 아니 막살았다. 조강지처, 아니 조강지부를 버렸으니 나는 막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술을 진탕 마시고 혼자 꺼이꺼이 울다가 어느 날은 미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실실 댔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주위에서 '첫사랑은 원래 망하는 거다 '결혼까지 안 가길 잘했다' 등의 근거 없는 말들을 수집하며 우리는 어차피 끝날 운명이었다고 자위했다. 그럼 잠시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야, 차라리 잘 됐어! 너 맘고생 많았잖아. 잊어! 세상에 널린 게 남자다"
".... "
"결혼 안 할 거면 그냥 빨리 헤어지는 게 나아"
"맞아. 난 결혼 못할 거야"
"됐고, 소개팅이나 할래? 거래처 사람인데 점잖고 괜찮아. 한번 만나나 봐"
"됐어"
"그냥 만나나 봐- 아님 말고"
그래, 이래나 저래나 괴로운 마음. 나가나 안 나가나 어차피 똑같은 인생.
남자들은 친절했다. 매너가 좋았다. 온통 그였던 세상에서 벗어 나니 바깥은 마치 거대한 기회의 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너무 한 사람만 보고 살았나... '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 자유롭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아본 지 오래였다. 이런 기분이었나 보다, 설렘 비슷한 감정이. 그 후에도 몇 번 소개팅을 더했다. 불편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볼 근육이 땅겼다. 집에 돌아오면 묘하게 허기가 졌다.
하지만 진지한 만남으로는 이어지진 못했다. 누군가 관심을 표하면 ‘얼마나 봤다고?’ 꼬아 생각했고 괜찮다 싶으면 어김없이 단점을 찾아냈다. 실은 매번 비교하고 있었다. 그와 다른 이들을.
'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해주었을 텐데. 그 사람은 이러지 않았는데. '
어쩌면 스스로를 테스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자로서 어떤지, 다른 사람도 그만큼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지, 내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여자인지 상대의 반응을 가늠해 가며…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대체로 상대를 통해 스스로를 점수 낸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타인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가늠하는 것이다.
하지만 설사 상대가 좋다고 해도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나를 얼마나 안다고..'라고 생각하며 상대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핬다. 반대로 싫다고 하면 '역시 날 사랑해 줄 사람은 없어...'라며 자기 충족적 예언을 강화한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를 괴롭히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근데 너 진짜 왜 헤어졌어? 생각해 보니 나한테도 말 안 해줬다, 너"
"10년 만났는데 이유가 어디 있냐. 안 헤어진 게 이상하지"
"흐음... 아니야. 너 뭐 있어"
베프라는 녀석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쪽팔린 나의 트라우마, 나의 상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