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을 알리는 북소리
결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제부터 모든 것을 공유하기로 약속했다.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감정적인 것까지 모두. 오래 만났지만 서로의 지감 사정이나 집안 사정은 잘 몰랐기에, 우리는 앞으로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은 물론 영혼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결혼을 위해선 서로의 통장을 솔직하게 다 까야했다. 나는 당시 직장을 다니며 모은 돈 3000만 원 정도가 있었고, 그는 단 한 푼도 없었다. 아, 있었다. 마이너스 통장…
결혼을 결심한 후부터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 그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데이트 비용은 거의 다 그가 부담해 왔고 그가 돈을 모으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열심히 벌어 모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문제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가 옆에서 전화통화를 하는데,
“네, 사장님, 네네. 200만 원 정도만 우선 가능하실까요? 네, 저번에 그 계좌로 보내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넵 들어가세요-” 전화기에 대고 연신 인사를 하는 그가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돈? 200만 원?”
“아니, 나 돈이 필요해서”
“뭐? 왜?”
“카드 값”
“200만 원이 부족해? 어디에 썼는데? “
“그냥 우리 이번에 이것저것 샀잖아”
“그럼 그동안 돈을 자주 빌렸어?”
“음… 가끔? “
“그럼 오빠 카드값이 계속 부족했던 거야?”
그는 친한 사장남에게 돈을 종종 빌린다고 했다.
세상에... 그가 돈을 빌린다는 사실보다 당장 카드값을 낼 200만 원도 없다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걸 그동안 내가 전혀 몰랐다는 것도. 처음에는 화가 났다.
'아니, 카드 값을 빌린다는 게 말이 된다는 건가? 그렇게 돈이 없어? 카드를 얼마나 쓴 거야?'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는 딱히 돈을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다. 쓸데없는 돈은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상금을 만들어 술을 마신다거나 사고 싶은 걸 산다거나 그런 건 꿈도 꾸지 않는 사람.
여름에는 티셔츠 몇 별로 나고, 정장은 아웃렛에서 할인하는 기성복을 사는 남자. 늘 좋은 게 있으면 나부터 생각했고 본인은 못 가져도 나에게는 좋은 걸 사주려는 사람. 차도 외모도 허세라고는 없고 검소하고 겸손한 사람이건만…
나는 곧이어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눈치 없게 굴었으니… 자꾸 뭘 사달라고 조르고 다른 남자와 비교하고. 결혼 때 명품 백 하나 못 받겠구나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오빠, 돈 빌리지 마. 내가 줄게. 그리고 앞으로 그런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이제 같이 갚아야지 왜 오빠가 다 내”
나는 그의 계좌로 200만 원을 보내며 쿨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제 그의 돈이 내 돈, 그의 빚이 내 빚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20대를 먹여 살렸으니 나는 그에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있었다. 친구에게 빌린 돈, 연이은 카드 값 등등…
충격적인 고백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집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전세든 분양이든 어디라도 살 집을 구하려면 대출을 받아야 했다. 나는 우선 직장에서 나오는 대출을 알아보고 그다음에 신용 대출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에게도 미리 알아보라고 말했다. 근데 그가 본인은 대출을 받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본인 명의라고 말했다. 부도 이후 부모님은 신용불량자가 되셨고 그래서 부모님 집도, 가게도 차도 모두 자기 이름으로 되어있다고. 이것이 그가 벌이에 비해 많은 세금을 많이 내고 있는 이유였다.
......
아아, 나는 그동안 왜 이걸 몰랐던 것일까… 아니, 왜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까....
순간 온갖 걱정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몰려왔다.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그래. 대출은 내 이름으로 받으면 되지. 그냥 받아들이자. 나는 이 남자를 선택했고 믿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그도 믿어야 한다'였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또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마 우리가 영혼의 도원결의를 맺은 후로 그는 정말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이런 순진한 남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카드값이었다.
“뭐? 아버님 카드값??”
“응”
“아버지 카드값을 오빠가 내?”
“음… 응 가끔”
“지금까지 계속 그랬어?”
“계속 그런 건 아니고 필요할 때”
“아버님 일 하시잖아”
“그게 생각보다 돈이 잘 안 돼”
어질어질했다. 그동안 월급으로 모자란 돈을 돌려 막기 하는 것도 모자라 부모님 카드값까지 내고 있었다니… 그리고 나는 또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니… 이상하게 그렇게 사이가 좋은 형도, 형수도 명절에 집에는 안오고 영상통화만 열심히 하더라니..
나는 그의 집이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아버님도 본인 일을 하시고 살고 있는 집도 있으시고.
“형님은? 누나는? 왜 다 오빠 명의로 되어있어?”
“형은 일찍 결혼했고 누나는 여자잖아… 누나 대학 못 간 것 때문에 부모님이 엄청 미안해하셔…”
‘그럼 오빠는? 오빠도 못 간 거잖아!’
속 마음이 목까지 차 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그의 집안 사정이야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결혼도 하기 전에 ‘니 , 내 집’하며 잔소리를 퍼붓는 악처가 되고 싶진 않았다.
순간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악다구니를 쓰며 서로에게 퍼부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니네 엄마가, 그러니까 니네 집 때문에....!!!'
나의 두터운 사랑도 현실의 무게 앞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