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그 시절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진짜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게. 지겹게 싸우면서도 30년 넘게 헤어지지 못하는 부모님, 그렇게 오래 만난 사람에게 한순간 돌아선 나. 정말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할까.
더 바쁘게 살자 다짐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 없이 매일매일 새로운 일을 만들고, 좀 더 나에게 집중하며 살기로. 없던 취미도 억지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취미란 그 사람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걸 해봐야겠다 싶었다.
헬스장도 끊고 테니스도 시작했다. 쇠든 공이든 열심히 들고 칠 때면 괴로운 생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즈음 집에 새로운 식구도 생겼다. 친구가 장기 출장을 가면서 맡긴 강아지였다. 준이는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든. 허리가 소시지처럼 긴 갈색 닥스훈트였다. 토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먹고 바람도 쐴 겸 준이를 데리고 나갔다. 공원 앞에서 준이는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었다.
"준아- 그만 가자. 거기 뭐 없어"
그때였다. 저 멀리 익숙한 모습의 누군가 보였다. 자잘한 진녹색 체크무니 셔츠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가오는 누군가. 나의 신묘한 능력이 오랜만에 진가를 발휘했다.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그였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를 보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얼어버렸다.
‘뭐야, 여기 왜 있지?? 잠깐만, 어떻게 하지? 못 본 척해야 하나??’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문득 얼마 전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한결오빠. 이 동네에 가게 냈대”
“뭐? 가게?”
“응, 저기 사거리에 새로 생긴 와인바. 버스 정류장 가는 길에, 한참 공사하던 곳”
“아, 어.. 어. 맞아. 무슨 어두운 술집 있던 곳”
“어, 거기 새로 오픈한 집, 그 집 사장이 오빠래”
"... 누가 그래?”
“현지가 얼마 전에 갔다가 만났다고 하더라”
....
‘와인바라...’
학창 시절부터 머리보다는 행동이 빨랐던 사람이다. 공부에는 큰 뜻이 없었고 집안 사정 때문인지 대학교는 졸업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아버지의 일을 돕더니 지인의 소개로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주류 회사 영업직. 힘든 일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야 끝나는 일.
“오빠, 나중에 장사 같은 거 해보는 거 어때?”
“장사?”
“응. 술집 같은 거. 술은 오빠 회사에서 받으면 되고 가게는 지민오빠 일 도와줘서 대충 알 거고”
일찍부터 일어나 밤 11시에 퇴근하는 그를 보면 늘 안쓰러웠다. 당시에는 회사도 안 다녀 본 나였지만 그의 피곤함이 눈에 훤했다. 주말에도 늘 전화를 붙들고 살았다. 나와 데이트 중에도 거래처에서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던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정말 가게를 냈다니. 가만, 근데 왜 이 동네야? 아무리 예전에 살던 곳이라고 해도, 왜 하필 여기에?
황당함과 반가움, 알 수 없는 화와 당혹스러움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