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화장실을 둘러싼 부녀의 전쟁
누군가와 함께 살 때 중요한 건 의외로 단순하다.
‘누가 얼마나 오래 화장실을 차지할 것인가’ 문제다. 화장실에서 깨끗이 씻고 상쾌하게 나오는 건 매우 본능적이고 중요한 일이며, 이런 일들은 정확히 원하는 때에 해소될 때 빛난다. 하루를 준비하는 신성한 의식이자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행사인데, 그 시간이 방해받는다면? 내면의 평화는 산산이 깨지고 만다. 아침 일찍 나가야 하는데 누군가 화장실에서 한참 나오지 않거나, 한참 여유롭게 씻고 있을 때 밖에서 누가 재촉한다면 하루의 균형은 금세 무너져 내린다.
내 평화를 자주 깨뜨리는 이는 다름 아닌 아빠다. 아빠는 성격이 급하고 배변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화장실을 드나들며 그의 속도는 특유의 성격만큼 빠르다. 반면 나는 하루 한 번 큰일을 보며 그 시간 동안은 느긋하게 거사를 치르는 편이다. 이런 성향의 차이로 우리는 아침마다 전쟁을 벌이곤 한다.
“빨리 나와!”
“악! 아빠예요? 알았어요!”
아빠가 화장실 문을 두드릴 때면 나는 서둘러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때의 찝찝함은 마치 힘들게 산 정상에 올랐는데 일출을 못 보고 내려오는 기분과 비슷하다. 아빠가 연이어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 가끔 짜증을 넘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나는 천천히 마음을 다스리며 일을 마친다. 문제는 아빠가 아니라 활발한 그의 장일뿐이라고, 나름대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재미있는 건, 이 부녀의 전쟁이 씻는 일에서는 정반대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아빠는 씻으러 들어가면 20분에서 30분을 공들여 정성스럽게 몸을 씻어내는 사람이고 나는 정 반대다. 그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꼼꼼하게 씻고 욕실까지 정갈하게 청소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사처럼 보인다. 나도 깔끔한 걸 좋아하지만, 씻을 때만큼은 ‘군대 다녀왔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효율을 추구하는 편이다. 반복적인 일에 불필요한 시간을 쓰기 싫어 최대한 빨리 마치고 나오려 노력한다. 마침 아빠와 나는 둘 다 아침형 인간이고 그래서 씻는 시간도 언제나 겹친다. 바쁜 아침에 누가 먼저 욕실을 차지하느냐는 우리가 겪어 내야만 하는 또 다른 전쟁인 것이다.
혼자 살 때는 방 두 개와 화장실 두 개가 있는 집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공간을 활용할 수 있었고 분명 자유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한 개의 공간을 나눠 쓰고, 서로의 생활에 맞춰야 한다. 예전에 비하면 굉장히 불편하지만 나는 때로 이 부당함을 즐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건 늘 나다. 나는 아빠의 여유를 방해하고 싶지 않으므로 조용히 기다리거나, 일찍 나가 먼저 씻고 나오는 쪽을 선택한다. 비록 나는 더욱 서둘러야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따뜻함이 흐른다. 어쩌면 이건 내가 딸로서 그에게 줄 수 있는 작은 배려이자 애정인지도 모르겠다. '이기는 것이 곧 지는 것이다'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이 말이 이제는 마음 깊이 와닿는다. 나는 아빠에게 화장실을 양보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화장실 하나를 두고 벌어지는 이 작은 전쟁은 단순히 누가 언제 씻느냐를 둘러싼 문제가 아니다. 세대가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리듬과 방식을 조화롭게 맞춰가며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아빠의 재촉에 중요한 일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나오는 이 찝찝함이, 그의 샤워를 방해하지 않으려 한 발 물러서는 이 순간이 결코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결심한다. 앞으로도 이 전쟁에서 반드시 지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비록 출근에 늦을지라도, 이 귀중한 패배는 그간 부모님과 함께 살며 배운 나름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이런 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일 아침, 누구보다 편안한 모습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아빠를 볼 때마다 나는 피식 웃고 만다. 비록 졌지만 그로 인해 아빠가 장내(?) 평화와 몸의 평화를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집의 진정한 ‘이너피스’가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