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자연 Oct 03. 2016

반강제적 미니멀리스트

크루즈 승무원 4년 차 - 내 삶의 변화




카톡. 카톡. 카카카카카카카톡



이런저런 추억을 재빨리 담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기도 한 스마트폰




크루즈에서는 와이파이가 비싸다. 지금은 그나마 새로 도입한 시스템이 보급화 되어서 세 시간 패키지에 36달러이니 많이 나아진 편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격도 비싼 데다가 속도까지 느려서 정말 필요한 것만 확인하고 얼른 꺼야 했다. 나야 안 쓰면 그만이지만, 집에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고 온 각 나라 크루 멤버들은 그나마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5분에 한 번씩 끊기는 스카이프와 애처로운 씨름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에게 와이파이란 기항지에 도착했을 때 어쩌다가 커피 한 잔 하며 무료로 잠깐씩 즐기는 즐거운 오락 정도의 개념이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카톡, 페이스북 업데이트 등을 시시각각으로 확인하는 건 바라지도 않고, 그저 오랜만에 우편함을 열듯이 엽서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안부들이 반가울 따름이다. 그렇게 4년 동안 나는 서서히 스마트폰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다.


이런 나는 휴가를 와서 와이파이가 아무데서나 빵빵 터지는 한국에 거한다 한들 스마트폰을 달고 살지는 않는다. 카톡이 아무 때고 울리는 게 방해가 되어서 무음으로 해 둔 것이 시작이었고, 사실 필요할 때 빼고는 거의 확인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다르다. 카톡을 보내면서 상대방이 바로 읽을 것을 기대한다. 내가 보낸 메시지 옆에 그 작은 1이 없어지나 안 없어지나를 살핀다. 1이 없어졌는데 답장이 없는 채로 몇 분이 지나면 그건 이름도 괘씸한 “읽씹”이다. 읽고 씹혔다는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런 작은 것에 분개하게 되었다. 내가 보낸 메시지를 상대방이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언제 이 앱을 열었는지까지 확인 가능한 세상. 실시간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장황한 해쉬태그와 함께 SNS에 올린 사진을 서로 칭찬해주는 게 미덕이 된 요즘. 나는 현기증이 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플랫폼을 새로운 소통의 공간으로 ‘이용할' 것이냐 ‘이용당할’것이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나는 괘씸하다 무심하다는 원망을 듣더라도 스마트폰과 SNS와는 단지 전략적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조금 뒤처지는 아날로그형 인간으로 만들어준 크루즈의 비싸디 비싼 와이파이 요금이 새삼 고맙다. 







반강제적 미니멀리스트



미니멀리스트: Minimalist 정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생활하고 단순한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



크루즈에서 손바닥만한 방 한 칸에서 생활하게 되기 전까지 부끄럽지만 한국에서의 내 생활은 이랬다. 



예전의 정신없던 나와 내 방 


외출을 한다? 일단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느라 선택받지 못한 옷은 이미 침대에 한 가득 쌓인 상태. 가방도 바꿔 매야 하니 가방 속에 들어있던 온갖 잡동사니는 일단 침대 위로. 외출 후 돌아오면 피곤하니까 입은 옷을 벗어서 이미 쌓여있는 침대 위 옷 더미에 살포시 얹어둔다. 이것저것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졸리다. 다 씻어서 눕기만 하면 되는데 침대는 전쟁터이다. 저걸 다 치우고 자자니 생각만으로도 급 피곤이 밀려온다. 내일 치우면 되지 뭐, 침대에 있는 옷 더미를 두 손으로 모아 1분 전까지 앉아있던 의자 위에 투척한다. 침대 정리 끝.

(이 정도는 양반이다. 낮잠이라도 자려고 결심한 날은 그마저도 귀찮아서 그냥 옷을 한 곳에 밀어 두고 남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고 잠이 들기도 했다) 





이랬던 내가 지금은 우리 집에서 가장 깔끔쟁이 잔소리꾼이 되었다. 이게 다 크루즈에서의 생활습관 덕분이다. 침대와 옷장으로만으로도 꽉 차는 작은 방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6개월을 지낸다는 건 나름대로의 규칙을 필요로 한다. 처음 출국할 때는 별 걸 다 싸서 짊어지고 갔었다. 갖가지 옷과 키마다 다른 구두들은 기본이고 방에 놓을 장식품까지 가져갔으니. 그러나 6개월 내내 가방에서 겨울잠을 자야 했던 불운의 내 짐들을 생각하니 그다음부터는 차차 가방 싸는 요령이 생겼다. 수건은 사실 제때 빨아 쓰면 세 개 이상 필요하지 않다. 방에서 편하게 입을 옷은 두 벌이면 되고, 유니폼을 입고 일하기 때문에 사복이 많이 필요 없다. 근무용이라도 구두를 굳이 다섯 개씩 챙길 필요도 없고, 화장품도 어차피 내놓고 쓰는 것은 정해져 있다. 무엇보다 안전제일의 크루즈에서는 주마다 한 번씩 Cabin inspection이 있어서 방을 늘 깨끗하고 단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외출할 때 불을 끄고 나가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우리 삶에도 디톡스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최소한의 것으로만 사는데 익숙해있다가 집에 오면 일단은 모든 게 너무나 풍족하다. 욕실에는 물도 콸콸 나오고, 개봉해 놓은 헤어, 바디제품은 종류별로 뭐 그리 많은지. 수건은 쌓아놓고 쓰고 있고, 그러다 보니 빨래는 넘쳐나고. 방에는 더 이상 읽을 일 없는 책, 아직 읽지 않은 책,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옷장에는 겨울 옷부터 시작해서 여름 나시티까지 철 지난 옷들이 화석의 지층처럼 쌓여있고, 필기구는 왜 이리 많은지, 어차피 쓰는 건 볼펜 하나인데. 


우린 풍족하다 못해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종류별로, 색깔별로, 재질별로 있는 운동화, 시시각각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기기들, 우리는 쉽게 질리고 쉽게 바꾸며, 묶음 할인에 열광하고, 유행에 민감하다. 





가끔은 우리의 삶에도 디톡스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집에 오는 날, 그 주는 우리 집도 살을 쏙 빼는 날이다. 읽지 않는 책이나 안 입는 옷은 싹 다 정리해서 필요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가방도 동생과 나눈다. 


이렇게 나는 "카톡을 제때 읽지 않는 반강제적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한국에 어쩌다가 한 번 와서 머물다 떠나다 보니 유행에도 둔감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을 봐도 이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새로 유행하는 줄임말이나 앱 사용법 등은 동생이 설명해줘야 이해하는 수준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내 삶이 좋다. 23킬로짜리 캐리어 두 개에 들어가면 꽉 차는 인생, 마음으로는 더 큰 바다를 품을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해도 되지 않을까.



4년 내내 나와 함께인 튼튼이 캐리어



매거진의 이전글 원래 까매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