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회사 방침이라는 건 정말이지 머저리같아!
드레스코드: 스마트 캐주얼 (반바지 금지)
나의 바다 위 다이아몬드 라운지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드레스코드이다. 다른 시간에는 괜찮지만 오후 다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열리는 칵테일 아워(다이아몬드 멤버들을 위해 매일 저녁 열리는 해피아워. 공짜 술이 제공되기 때문에 많은 게스트들이 방문한다)만큼은 스마트 캐주얼 차림으로 라운지를 방문해야 하며 특히 반바지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
이 규칙에 대한 게스트들의 반응은 모두 다르다. 크루즈가 정말 호화 여행이었던 시절부터 오랫동안 크루징을 해 온 게스트들은 적어도 이 드레스코드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녁이면 턱시도에 칵테일 드레스를 차려입고 모두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즐기던 그 전통적인 크루즈 여행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일거다. 하지만 이제 막 대중화된 크루즈를 즐기기 시작한 게스트들의 경우 휴가만큼은 무조건 편하게 입자는 주의이다. 우리 부모님 또래의 어른들도 반바지에 쪼리를 신고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긴 타이타닉 영화에서 일등석 사람들의 차림새나 문화를 기억한다면 지금의 크루즈 문화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진 건 맞는 것 같다.
어쨌거나 라운지 규칙은 라운지 규칙! 반바지 금지!
하지만 이 규칙을 두고 난 또 게스트들과 실랑이를 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저기 반바지를 입은 게스트가 들어왔다며 빨리 내쫓아 달라며 나에게 이르고, 반바지를 입은 게스트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옷 입은 거 갖고 뭐라고 그러냐며 들은 척도 안 한다. 이럴 땐 정말 투명인간으로 변해서 맥주 한 병 집어들고 라운지를 살그머니 탈출하고 싶을 정도다.
Mr.Shorts.
반바지 맨을 만나다
내가 텍사스 아저씨 데이빗을 만난 건 플로리다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 긴 크루즈에서였다. 유난히 다이아몬드 멤버들이 많았던 크루즈라 아예 라운지 앞에 "No Shorts"(반바지 금지) 사인을 걸어놨다. 하지만 이 큼지막한 사인을 본체만체 걸어 들어가던 게스트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라운지 규칙을 설명하는 나에게 너네 회사 규칙은 아주 멍청하다며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시뻘게진 얼굴로 나가버리는 게스트. 그 게스트를 다음날 저녁에도 또 만났다. 역시 반바지 차림이었다. 우린 대본을 읽듯이 어제와 같은 대화를 반복했다. 대신 이번에는 게스트에게 맥주 한 병을 테이크아웃해드렸다. 어제 게스트의 손에 들려있던 밀러 라이트가 기억나서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려고 바에서 가져온 것이다. 게스트는 맥주를 한번 보고 나를 한번 보더니 내 손에서 맥주를 빼앗다시피 가져가며 소리친다.
"너네 회사 방침이라는 건 정말이지 머저리 같아! 누가 휴가 와서 긴바지를 입고 싶어 한다고!"
그 이후로 데이빗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은근히 안도했다. 14일 동안의 긴 크루즈도 끝나고 배는 스페인에 도착했다. 우리의 반바지 맨도 내렸을 거였다. 보딩이 시작되고 새로운 게스트로 북적거리던 그 날 저녁,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눈에 보였다. 데이빗이었다. 아... 믿고 싶지 않았다. 다음 크루즈를 연속해서 예약한 Back to back 게스트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데이빗의 트레이드마크. 반바지 차림은 여전했다. 난 데이빗에게 다가가기 전에 먼저 그의 부킹 상태를 확인했다. 맙소사. 앞으로도 두 개의 크루즈가 연속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 달이 넘게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난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데이빗, 이번 크루즈에도 계신 줄 몰랐네요. 제가 무슨 말씀드리려고 왔는지 아시죠?”
역시나 데이빗은 큰소리부터 친다.
“또? 진짜? 반바지 이거 못 봐준다고?”
나도 이젠 물러설 수 없었다.
“데이빗, 앞으로 한 달동안 데이빗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을텐데 우리 맨날 이렇게 싸울 수는 없잖아요. 이렇게 매일 반바지를 입고 오면 나는 매일 데이빗을 쫓아내야 해요. 진짜 힘들어 죽겠어요. 제발 나를 봐서라도 라운지에서 저녁시간만큼은 다른 바지를 입고 와 주면 정말 안될까요?”
또 머리끝까지 시뻘게지며 화를 낼 줄 알았던 데이빗이 허허 웃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나 그러면 여기 닫기 직전에, 딱 2분 전에 들어와서 맥주 마시는 건 괜찮아?”
다음 날 데이빗은 처음으로 긴 면바지 차림으로 라운지에 들어왔고 나에게 큰소리를 쳤다.
“자, 봐! 나 긴바지 입었어. 빌어먹을. 불편해 죽겠네”
나의 승리다!!!! 내가 데이빗에게 긴바지를 입혔다!!!!!! 난 침이 마르도록 데이빗에게 온갖 칭찬을 한다.
“오 마이 갓, 데이빗!!!!!! 너무 멋있어서 몰라봤잖아요. 내일도 이렇게 입고 올 거죠?”
데이빗은 민망한지 억지로 툴툴대며 온갖 인상을 찌푸리고 말한다.
“나 이제 여기 소파에 딱 앉아서 반바지 입고 들어오는 놈 있나 감시할 거야”
한 달 동안 나와 데이빗은 절친이 되었고, 데이빗은 떠나기 마지막 날 라운지를 찾아와 말했다.
“제이, 이거 내 텍사스 집 주소야. 혹시 텍사스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해. 나와 린다가 재워줄 테니까. 대신 우리 집 드레스코드는 무조건 반바지야. 그리고 너네 회사 그 멍청한 규칙에 대해서는 내가 꼭 항의할 거니까 걱정 말고”
데이빗은 여전히 라운지 규칙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크루즈 후기에 여러 수식어를 활용한 최악의 컴플레인을 올렸다. 하지만 그 라운지의 호스트였던 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However the Diamond lounge concierge Jay has a great personality. We adore her"
(하지만 다이아몬드 라운지 컨시어지 제이는 정말 인간성이 좋았다. 우린 그녀를 사랑한다)
여전히 라운지 규칙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날 위해서 남은 기간 동안 긴바지를 입어준 데이빗이 참 고맙다. 근무 초기 때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 게스트의 컴플레인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맞는 말이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모든 컴플레인을 퍼스널 하게 받아들이면 마음이 상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게스트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 나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게스트는 나에게 화를 낸다. 그러니 매니저는 컴플레인을 퍼스널 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충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컴플레인을 퍼스널 하게 받아들이며 핸들링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진심이 담긴 마음을 내보이면 게스트도 마음을 준다. 게스트도 이미 알고 있는 회사의 규칙을 읊기 전에, 먼저 게스트와 눈을 마주치고 공감의 텔레파시를 쏜다.
그렇게 나는 종종 컴플레이너와도 절친이 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