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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Feb 17. 2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당신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요?



"이거 나 대신 꼭 반납해줘야 해. 안 그러면 나 돈 물어내야 한다고"
"걱정 말아요 헬렌. 제가 갖다 둘게요"



보송보송한 백발을 예쁘게 손질한 할머니 헬렌은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열쇠를 넘긴다. 내 앞에 있는 것은 헬렌이 일주일 동안 타고 다니며 크루즈 구석구석을 활보하던 전동 스쿠터다. 크루즈를 예약하면서 함께 신청해 둔 것이기 때문에 하선할 때는 객실 안에 두고 가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나이 구십의 할머니가 스쿠터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으니 하선을 하는 장소까지 스쿠터를 타고 내려올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렸다. 내가 대신 반납하면 되니까. 하선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Wheelchair assistant(몸이 불편한 게스트를 도울 수 있도록 배정된 휠체어 도우미)가 손수 밀어주는 휠체어로 갈아타고 배를 떠나면서도 헬렌은 나에게 재차 신신당부를 한다.


"꼭 잘 갖다 줘야 해. 나 분명히 열쇠 넘긴 거다!"


헬렌이 떠난 뒤 난 스쿠터에 올라탔다. 사실 크루즈 안에서는 휠체어나 스쿠터를 탄 사람들을 보는 것이 흔하다. 몸이 불편한 장애우이거나 걷는 게 힘든 노인분들이다. 미국 디즈니월드에서 일할 때도 워낙에 많이 봐왔기 때문에 나에겐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막상 헬렌의 스쿠터에 올라타고 핸들을 잡으니 익숙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눈높이부터가 달라졌고, 시야도 서서 걸어 다닐 때와 달랐다. 결론적으로 스쿠터를 반납하러 가는 몇 분 동안 나는 두 가지의 상반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첫째, (당연한 이야기지만) 걷는 대신 스쿠터를 탄다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불편하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즈 여행은 생각보다 할 만하겠다는 것


가장 불편했던 걸 꼽자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걸어가면 금방 올라갈 수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둘째 치고, 스쿠터 사이즈 때문에 사람이 반 이상 찬 엘리베이터는 그냥 보내야 했다. 그러니 단 1층을 올라가기 위해 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건 굉장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물론 몇몇 게스트들은 내려서 양보해주겠지만 그게 늘 기대할 수 있는 친절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대체로 크루즈 안의 모든 시설은 휠체어나 스쿠터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승선을 했다면 큰 불편함은 없다. 특히 장애가 있는 경우 크루즈를 예약할 때 미리 해당란에 체크하여 알리는 것이 좋다. 매 크루즈가 시작할 때마다 호텔 부서 직원들은 Special Needs라고 부르는 이 게스트들의 명단을 제공받는데, 서비스 제공 차원의 이유도 있지만 크루즈의 특성상 비상시에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승객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각 층마다 휠체어의 접근이 편리하도록 만든 특수한 객실들이 있기 때문에 예약할 때 참고하면 훨씬 안정된 여행을 할 수 있다. 승선과 하선 시 필요한 경우 휠체어 도우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줄을 서야 하는 경우 휠체어나 스쿠터는 맨 앞으로 안내하기 때문에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피로함이 덜하다. 선내에서 예약할 수 있는 기항지 관광의 경우에도 자신의 활동 레벨에 맞춰서 적당한 투어를 선택할 수 있다. 아무래도 크루즈 여행의 경우 움직임이 제한적인 노인 분들의 비율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짧고 쉬운 투어들은 첫날부터 솔드아웃될 만큼 인기가 많다. (물론 나열한 사항들은 크루즈사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장애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하다면 집 밖에 나오는 것부터가 모험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여행에 비해 크루즈 여행은 이렇게 맞춤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친절하다. 혹시 여행 중에 아프거나 하는 비상상황이 생기더라도 선내 메디컬에서 웬만한 응급치료가 가능하며, 심각할 경우 기항지에 있는 로컬 병원으로 안내해 주거나 드문 일이지만 헬기를 띄워서라도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시켜 준다. 즉 만일의 사태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실제로 크루즈에서는 아픈 사람들을 많이 만나곤 한다. 치료를 포기한 암환자, 헬렌 켈러처럼 앞도 안 보이고 말도 못 하며 들리지도 않아서 가끔씩 방을 못 찾고 복도에서 헤매던 남자, 허벅지 밑 부분이 둘 다 잘려나가고 없었던 할아버지, 문지방 넘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던 내 또래 자폐증 청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남편과 함께 여행하던 아내, 뇌성마비를 가진 꼬마에서부터 백 세 할아버지까지.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출처: cruiseline.com






죄송하지만 문 좀 잡아주세요


라운지 밖에서 소리가 들려서 얼른 나가보니 시트가 거의 150도가량 젖혀지는 특수 제작된 휠체어 두 개가 들어오고 있었다. 휠체어를 미는 두 사람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국인 부부였다. 그들은 밝은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하며 각각의 휠체어에 누워있는 두 딸 베티와 피오나를 소개했는데 안타깝게도 둘 다 뇌성마비라고 했다. 그녀의 엄마가 휠체어의 담요를 피오나의 목까지 덮어주며 말했다.


 "베티는 스물여섯 살, 피오나는 스물두 살이에요. 우리 애들이 유럽 크루즈는 해봤는데 아직 호주랑 뉴질랜드를 못 와봐서 큰 맘먹고 왔어요. 미국에서부터 비행시간이 얼마나 길었나 몰라요.”


뇌성마비 딸 둘을 커다란 휠체어에 하나씩 태우고 미국에서 호주까지 여행을 온 부부의 의지는 정말 놀라웠다. 족히 스무 시간 가까이 되었을 장거리 비행. 혹여나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왔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에 비해 몇 배는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난 캐리어에 백팩 하나 들고 움직이는 것도 허덕허덕하는데 그 무거운 휠체어를 미는 부부에게서는 힘이 넘쳤다.


곧 이들은 라운지에서 최고 인기 손님이 되었다. 특히 호주 게스트들이 이들에게 얼마나 친절했는지 모른다. 나가고 들어올 때 나보다 먼저 달려가 문을 잡아주고 반갑게 인사해 주는 건 기본이었고, 엘리베이터까지 함께 가서 버튼을 눌러주기까지 했다. 저녁이면 라운지에 삼삼오오 앉아서 칵테일을 즐기던 게스트들은 이들이 오면 휠체어가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양보를 해주었다. 이후에 엄마인 제시는 나에게 말했다.


“사실 우리 아이들 둘 다 입양했어요. 생긴 건 닮았지만 진짜 자매는 아니고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아이들에게 세계 곳곳을 보여주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일단 크루즈에 타면 내리는 날까지 푹 쉬며 안정적인 여행을 할 수 있으니 할 만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밖에 나가는걸 너무 좋아해서 기항지에 도착하면 꼭 산책을 하곤 해요”


뭔가 마음에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입양이라니. 아프고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을 그것도 둘 씩이나. 몸을 뒤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이 친구들을 보며 '아픈 아이들에겐 너무 버거운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크루즈가 끝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이들의 먼 여정을 생각하니 '꼭 호주까지 와야 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겼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제시의 말을 듣고 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이들이 크루즈 여행을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가장 편안한 여행이기 때문이고 그 외에는 딱히 초이스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그들에게 크루즈 여행이란 드넓은 바다 위에서 힘차게 날갯짓하는 한 마리의 알바트로스 새*가 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비록 몸은 자유스럽지 못할지라도 마음만큼은, 그리고 그들의 영혼만큼은.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시한부 여행자들이 아닐까. 세상은 정말 내가 평생 가도 다 깨닫지 못할 놀라움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알바트로스류는 모든 조류 중 가장 활공을 잘하는 조류로 바람 부는 날에는 매우 길고 좁은 날개로 날갯짓을 않고도 수 시간 동안 떠 있을 수 있다. 알바트로스는 날개 길이가 3m에 이르며 5,000km까지 비행이 가능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다 새, 알바트로스 (EBS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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