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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Apr 12. 2017

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산다

바다 위 나의 작은 집


어렸을 때 생각했던 상상 속 서른의 내 모습은 마냥 어른이었다. 우리 엄마가 날 서른에 낳으셨으니 나도 그 나이엔 내 집, 내 차, 남편, 나와 그이를 닮은 아기가 당연히 있을 줄 알았다. 올해 7월이면 빼도 박도 못하는 만 서른이 되는 지금. 나에겐 자랑스러운 장롱면허와 아주 약간의 저축이 있으며, 주변에서 "결혼 안 해?"하고 나서서 걱정을 해주는 처지이다. 그러나 난 이미 꿈을 이루며 살고 있으니 걱정이 없다. 벌써 내 집을 마련했냐고? 그럴 리가.


영어로 '집'은 건물, 거주지를 지칭하는 'House'와 정서적인 의미의 'Home'으로 구분하여 표현한다. 서른인 나에게 아직 내 명의의 House는 없지만, Home은 있으니 만족한다.


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산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뭐, 엄밀히 말하자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현대판 정도 된다.

바로 이 곳.

전 세계를 누비는 크루즈이다.

난 바다 위 도시의 시민이자, 어엿하게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입주민이다.







크루즈가 내 집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크루즈 여행을 하는 승객이 되거나, 승무원이 되거나.





2년 전, 릭 할아버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귀 밑에서 시작하여 턱 라인을 멋지게 덮는 헤밍웨이 스타일의 하얀 수염을 고수하는 릭은 상하이에서 싱가포르까지의 2주짜리 크루즈를 타러 왔다가 나를 만났다. 그는 다이아몬드 멤버로서 내가 근무하는 VIP라운지에 자주 들렀다. 우린 단순히 여행으로서의 크루징뿐만이 아닌 라이프스타일로서의 크루징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나름의 결론을 냈다. 


일상에서 소비하는 모든 비용을 다 따져보았을 때 크루즈에서 사는 것이 비슷하거나 저렴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80박 이상의 크루즈를 한 다이아몬드 멤버들의 서비스를 전담하는 직업의 특성상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크루징을 밥먹듯이 한다’는 것. 물론 그들은 플로리다 항구 주변에 살면서 저렴하게 나온 라스트미닛 티켓으로 얼마든지 가방 하나를 꾸려 배에 올라탈 수 있는 축복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말한다.


“있잖아, 내가 계산을 해보니까 집에 꼼짝 않고 앉아있어도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통신비, 식비는 기본적으로 든단 말이지. 게다가 어디 나가서 외식이라도 하거나, 남편이랑 영화라도 한 편 보러 가 봐. 자동차 기름값 들지, 나가서 쓰는 돈 있지. 이거 다 계산해보면 차라리 크루즈를 타는 게 돈이 덜 든다니까? 호텔급 객실에, 레스토랑 음식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도 고마운데 공연 보랴 여행하랴 심심할 틈이 없으니까 이런 지상낙원이 없지”


크루즈 내에 병원 시설이 갖춰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바다의 수평선을 마음껏 바라보며 운동할 수 있는 피트니스, 미용실, 스파가 있으므로 생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하우스키핑이 하루에 두 번 깨끗하게 객실 청소를 해주는 것은 기본이며, 세탁도 약간의 요금으로 해결할 수 있고, 요리를 할 필요도 없으니 가사분담 문제로 부부가 다툴 일이 없다. 게다가 아침에 눈을 뜨면 매번 다른 도시에 와있곤 하니 온 세계 구석구석이 내 집 앞마당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특별한 기념일이나 휴가를 맞이해서 모처럼 크루즈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상대하는 ‘크루즈가 취미인’ 이 분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즉 평소에 크루즈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같은 특별한 날은 집에 돌아가거나 아니면 가족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여 홈파티를 즐기는 식이다.




디지털 노마드의 아날로그식 거처


내가 마리오를 만난 건 작년 1월이었는데 막 승선해서 유니폼도 갖춰 입지 않은 내게 먼저 다가온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3개월 동안 이 곳에 있었고, 앞으로도 3개월 더 있을 거니까 우리 매일 보게 될 거야”하며 그 큰 손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는 '디지털노마드'라는 신조어가 생기기 전부터 이미 ‘맥북을 든 유목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역설적으로 느림의 여행인 크루즈를 즐긴다.


그는 40대 중반에 사직을 결심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는데 하나는 자신만의 사업을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인터넷이 있다면 업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여행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마이애미에 살면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크루즈를 시험 삼아 타보았고, 그 날 이후로 그는 17년 동안 천 번이 넘는 크루즈 여행을 해오고 있다. 일 년의 300일 이상을 크루즈에서 보낸다는 전설 같은 그의 이야기는 이미 크루즈 마니아들 사이에 유명하다.


마리오는 매일 아침 노트북을 들고 나와 업무를 본다. 오후 두 시가 되면 그 날의 업무를 마치고 풀사이드에 가 수영을 하며 사람들을 사귄다. 그러다가 시가 클럽에 가서 향 좋은 시가 한 대를 즐기고 나오면서 마주치는 승무원들과 한참 대화를 하기도 한다. 레스토랑이나 뷔페에서 즐기는 저녁식사 후에는 이브닝 쇼를 볼 때도 있지만 사실 이미 다 본 것이기 때문에 라틴댄스파티가 벌어지는 바에 들러 신나게 스텝을 밟는다. 실제로 그는 훌륭한 춤꾼이며, 이야기보따리에서 꺼내는 신밧드의 모험 저리 가라 하는 온갖 무용담들 때문에 다른 손님들에게, 승무원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서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장래희망이 생긴 건. 마리오처럼 크루즈에 내 방 한 칸을 갖고 평생 여행하면서 글을 쓰는 삶은 나의 바다 빛 로망이 되었다. 장담컨대 수도권 아파트를 분양받을 돈이면 가능한 시나리오다. 인터넷을 이용해 경제활동까지 할 수 있다면 말할 것도 없고.





크루즈 승무원으로서 산다는 것




사실 난 이미 내 장래희망의 미리보기 중이다. 크루즈 승무원인 나에게 13만 톤짜리 크루즈 배는 단순한 호화 여객선이 아니다. 그곳은 나의 집(Home)이다. 삶이 있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일상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돈을 내고 탄 승객이 아니기에 크루즈에서 나의 일상은 어떻게 보면 단출하기 그지없다. 손바닥만 한 크루 방이 그 예다. 침대와 작은 탁자를 제외하고 남는 공간에서 어떤 자세로든 다리를 쭉 펴고 요가를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니. 그마저도 룸메이트와 이 층 침대를 쓰며 쉐어를 하니 룸메와 함께 있는 날은 둘 중에 하나는 침대에 앉아있어야 다른 한 명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좁은 방 안에는 작은 마법이 걸려있다. 룸메와 나, 둘이면 꽉 차는 방 안에 가득한 어떤 에너지다. 바로 나의 문화와 그녀의 문화가 공존하는 것. 낯선 언어가 가득 적힌 그녀의 소지품에서 난 지구 반 바퀴만큼의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이고, 그녀도 마찬가지로 내가 가져온 낯선 동양의 공기에 환상을 품는다. 아래 위로 누워서 우리는 조잘조잘 바다 건너 고향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침대 벽면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푸른색 나비 자석이 종류별로 붙어있고, 내 침대 머리맡에는 아빠의 환갑 생신을 기념하여 찍은 가족사진이 붙어있다. 역설적이지만 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만큼이나 떠나와 있는 삶을 사랑한다. 누우면 천장이 코 앞인 작은 벙크 침대는 내 안식처이고 아래층 침대에서 옅게 코를 골며 자는 그녀는 나의 친구이자 가족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모두가 상상하는 크루즈에서의 화려한 삶이 내 일부가 되는 순간이 온다. 하늘을 물들이는 일출로 바다의 색깔이 발그레해질 때 즈음이면 난 라떼 한 잔을 손에 들고나가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때로는 오픈 데크에 있는 조깅 트렉을 걸어보기도 하는데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바람이 센 편이라 결국 몇 분 못 견디고 들어오곤 한다. 그러나 배가 기항지에 도착하는 날은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고서라도 나가 배의 입항을 지켜본다. 리스본에서의 아침이 그랬다. 5년이란 시간은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어대던 내 모습을 조금 차분하게 바꾸어 놓았지만 그래도 잔잔한 감격, 마음속 미세한 떨림은 여전하다.






Home away from home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적다. 바다 위 여행자인 내 삶은 항공사가 허용하는 23kg짜리 가방 두 개에 나눠담으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마음속의 어떤 것들은 더 커져가는데, 그런 행복한 포만감은 차오를수록 넉넉해지니 참 신기하다.


서울의 아파트 값은 앞으로도 얼마나 오를지 모르겠다. 그러나 바다 위 나의 작은 공간은 나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내 한 몸 뉘일 수 있는 손바닥만한 이 곳은 나의 집이다. 지친 일상일 때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꿈이다. 만남이 있고 헤어짐이 있는 곳이다. 우린 이 곳을 '제2의 고향'. Home away from home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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