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려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나에게 존재하는 귀와 혀, 그리고 눈이, 그리고 심장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어떠한 말과 감정에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20대 중반의 어느 날이었다.
익숙한 모든 소리를 그저 흘려 내보내던 귀, 입천장을 톡톡 치며 하고 싶은 말들을 내뱉은 혀, 끔뻑 끔뻑 보고 싶은 것들만 담아내던 눈, 마냥 나만을 위해 더운 피를 뿜는 심장이 새로운 환경과 감각에 몸부림치고 뒤틀렸던 날.
너에게서 내가 버려졌던 날.
너에게서 내가 버려진 그날.
쓰레기가 아닌, 나 역시 버려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였다.
너희들에게서 버려진 나는 서울 곳곳에서 나의 마음은 재활용되지 못하고, 타지 않는 뼈는 쓰레기처럼 천덕꾸러기가 돼 길 위에 처박혔다. 마음의 상처가 썩어 흐르는 진물이 눈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이제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다시 나를 사랑할 생각은, 노력은 없어?"
"나를 버리는 것을 후회하지 않나요?"
이러한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진심이란 단어로 나를 떼어내고 침묵 속에 나를 두고 떠났다.
나는 종종 서울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청계천,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카페의 창가.
내가 살던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 앞.
그가 다니던 회사 앞 카페 3층, 화장실 근처 어느 테이블.
어느 날은 뙤앟볕에 하늘이 푸르고 높았다. 나는 예쁜 원피스로 잘 포장된 체 맑고 고운 어느 날 눈물과 함께 버려졌다. 날이 더워 금세 눈물이 바싹 말라갔지만 눈물 자국이 남기도 전에 또다시 눈물은 얼굴 위에 줄줄 쏟아졌다. 나를 버리는 사람도, 버림을 당하는 나도 곱게 차려입고 두 손을 맞잡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어느덧 고운 포장이 젖고 3시간이란 길고 긴, 결심했던 것들이 번복되길 반복하며 감정이 요동치는 위태로운 시간이 지나 눈가가 파리해져 둘 다 지쳐 쓰러질 때 즈음, 나는 완전히 그에게서 버려졌다.
어떤 날은 무관심 속에 조용히, 아주 비참하게 널브러졌다. 아주 먼 곳을 보는 사람처럼,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랑이었던 것 같은 미묘한 표정과 냉랭한 눈빛. 네 품에 안겨 미동하던 나의 살결과 숨소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내가 아닌 다른 먼 곳을 생각하며 마네킹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혹여 이게 꿈은 아닐까 두 눈을 비벼되는 나와 달리, 다정한 말을 내뱉던 입술이 면접장의 면접관처럼 곧은 일자를 그리며 닫혀있는 게 어색해 두리번거리는 나와 달리, 앞의 그는 단정했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처럼 나를 타이르고 나는 죄지은 사람 마냥 동그랗게 몸을 말고 웅크러져 훌쩍이며 버려졌다.
식지 않는 사랑은 정신병이라고 했다. 결국 모든 사랑의 끝은 내가 버리거나, 내가 버려지거나 둘 중 하나인 걸까? 불현듯 머리를 누르는 허무함에, 온몸이 아려오는 차가운 바람에, 휑하니 비워진 마음 한편에 식지 않는 사랑에 대한 열망이 마른 낙엽 위에 떨어진 담배 하나처럼 작은 불씨를 피워 올린다.
말랑한 자두, 달콤한 홍시처럼 여문 마음의 끝은 바닥에 떨어져 썩어 문들어진 낙과인 것일까? 여문 사랑이 고운 손에 사랑스럽게 따여 보드라운 입술과 혀에 감겨 삼켜지고, 과즙이 혀를 적시고 입술에 맴돌고, 영원히 몸속에 간직될 순 없는 것일까? 나직이 맛이 좋다고, 기분 좋게, 영원히 그 감정을 되새김할 순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