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 눈의 여왕의 배경이 된 겨울왕국 라플란드에 가다

북위 68도 라플란드 사리셀카. 북극의 펍에서 마무리하는 하루

by missnow

평소 혼자 떠나는 여행은 유독 ‘떠남’이 목적인 사람처럼 유독 ‘이동’이 많은 편이다.

오늘은 이번 여행에서 2번째로 맞이하는 대이동의 날이다. 인간 철새처럼 또다시 아주 먼 곳을 향해 여정을 떠나고 있다.

새와 달리 날개가 없는 나는 배, 비행기, 열차 등 여러 이동 수단에 의지해서 나라에서 나라로 도시에서 도시로 바다를 건너, 산을 넘어 떠남 그 자체를 실현하는 중이다.

탈린에서 페리를 타고 헬싱키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져 있었다. 오후 3시에 해가 지는 건 지난번 북유럽 여행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참..

문명이 발달해서 인공적인 빛으로 낮을 꾸며 낸다고 해도 사람들의 생체리듬까지 속일 수는 없다. 인공적인 빛이 진짜 햇빛을 받아야만 생기는 에너지까지는 줄 수 없는 거다.

그래서 나는 북쪽 나라 사람들이 이 긴긴 겨울을 어떻게 나는지가 몹시 궁금하다.

(겨울을 보낸다는 표현보다는 겨울을 난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긴 밤의 세상을 여행하는 여행자로서 나는 이 긴긴 어둠의 시간은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적합한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내 안의 심연으로 빠져들 수 있는 게이트 같은 장소.

그래서 연말에 계속 나는 이렇게 홀로 북쪽 여행자가 되길 자처하는 것 같다.

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의 심연에 다가가기 위해, 세계의 심연에 한 발치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헬싱키 페리 터미널에서 공항으로 이동해 이발로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 했다.

비행기 시간 빠듯해 초조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끌며 뛰었다.

넣은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가방이 역대급으로 무거웠다.

내 뒤에서 캐리어가 끼기기기기끼~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왔다. 그 소리가 나 좀 그만 혹사시켜! 라고 캐리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이 들렸다. 하도 정신없이 뛰었더니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였다.

20191226_200039.jpg

북위 66도 33분 지점 이상의 지역을 북극권이라고 하고 이 북극권에 속하는 북유럽 지역을 라플란드라고 한다. 라플란드 지역은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의 실제 배경이 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발로 공항에서 나와 딱 든 생각은 아! 여기가 엘사가 사는 겨울왕국이구나! 였다.

서울과 비슷한 날씨였던 헬싱키와는 달리 확실히 북극권에 와서인지 숨을 쉬자 콧속으로 얼음 결정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밖에 보이는 건 온통 눈이었다. 하늘은 정말 칠흑같이 까맸고 그래서인지 하얀 눈이 더 대비돼서 강렬한 느낌을 줬다. 저녁 8시가 지난 시간이라 사리셀카로 가는 버스가 있을지 걱정을 좀 했는데 다행히 공항에서 나오자 사리셀카, 킬로파 등의 주변 도시로 가는 버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왕국이라는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보이는 풍경 자체가 내가 떠나온 곳과는 사뭇 달랐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 눈길을 버스 타고 달릴 뿐인데도 행복했다.

북쪽의 핀란드에서도 가장 북쪽인 이발로. 이발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사리셀카까지 먼 길을 떠나온 이유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오로라를 볼 가능성이 큰 곳. 운이 아주 좋으면 숙소에서도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핀란드에서도 북쪽 끝에 있는 사리셀카까지 오게 됐다.

20191226_211653.jpg
20191227_074117.jpg

온통 눈밭에 듬성듬성 숙소동이 떨어져 있어서 인포 데스크에서 숙소 위치가 적힌 지도까지 받았지만, 무려 눈밭을 30분을 헤맸다. 그렇게 헤매다 다행히 일하시는 분의 도움을 받아 숙소를 찾았고 숙소는 너무도 정말 너무도 아늑했다.

겨울 나라에 오면 너무 신이 나서 쉬고 싶은 마음을 접고 짐만 숙소에 넣어두고 동네 탐험을 나섰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설레어서 그냥 잠들고 싶지 않았다.

20191226_230649.jpg
20191226_222206.jpg
20191226_224257.jpg

동네의 유일한 마트인 k마트와 레스토랑들은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고, 문을 연 곳이라고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한 술집과 작은 펍뿐이었다.

한국에서 혼밥은 종종 해도 밖에서 혼술을 한 적은 없었는데 자주 했던 것처럼 카운터에 앉아 자연스럽게 맥주를 시켰다.

오로라 지수도 너무 낮고 계속 눈이 오고 있어서 오로라는 오늘은 아마 못 볼 듯싶었다.

오로라 관측을 목적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나는 겨울, 북쪽 지방이 주는 느낌 자체를 좋아해서 오로라를 보지 못한다 해도 그냥 여기까지 내가 왔다는 것에 벌써 만족스러웠다. 떠나지 않았으면 절때 상상으로도 오지 못했을 곳이다.

낯선 동네 펍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며 처음 듣는 음악을 들었다.

창밖에 보이는 것도 하늘에서 계속 내리고 있는 것도 온통 새하얀 눈뿐이었다.

이곳은 실제로 와보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되는 눈의 여왕이 사는 곳, 엘사가 사는 겨울 왕국 그 자체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