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과연 선량하고 우량하지 못한 것인가.

by MissP

1. 행실이나 성품이 나쁨.
2. 성적이 나쁨.
3. 물건 따위의 품질이나 상태가 나쁨.


나쁜 피.

간혹 이런 표현을 들어보았는가?


이런 일이 있다고 해보자.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고, 거기에 외모까지 나름 훌륭하다. 항상 '착하고' 말이다. 항상 성실한 우등생이고 교내 봉사도 빠지지 않는다. 말썽 한 번 부리지 않는다. 밖에서 보면 고생 한 번 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의 부모가 아주 개차반이다. 아버지는 도박 중독자에 제대로 직업조차 가진 적 없는 한량이고,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에 가정폭력을 일삼는다. 부모는 서로 지긋지긋해서 이혼을 했다. 아이들은 어머니 밑으로 따라가 자랐고, 아버지는 어린 시절 이후 본 일이 없다. 어느새 성인이 된 자녀들은 열심히 살았지만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 아직도 집에 들어가면 술에 취한 어머니는 술잔을 집어던지기 일쑤다. 퇴근한 자녀를 붙들고 갑자기 엉엉 울며 죽고 싶다고 한다. 그 아이는 마치 이런 일이 일상인 것처럼 누가 부모인지 모를 정도로 의젓하게 술에 취한 어머니를 달래고 재운다. 어느새 밀린 집안일은 다 정리가 되었고, 지친 자녀는 씻고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자녀들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산다. 누구도 가정환경을 유추하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저 '불량품' 아래서 태어난 자녀들은 불량품인가?


우리는 분명 연좌제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연좌제가 없어졌을 뿐, 연좌제는 존재한다.


그럼 다른 예를 들어보자.


누가 보기에도 훌륭한 가정이다. 작지만 탄탄하고 매출이 우수한 중소기업을 이끄는, 거기에 기부와 불우아동 돕기도 열심히 하는 아버지와 미인대회 출신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와 아이들에게 배울 기회를 주기 위해 무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어머니를 둔 자녀가 있다. 그 자녀는 외동으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싶은 것, 필요한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었다. 그뿐인가. 공부도 잘하고, 거기다가 운동도, 노래도 잘한다. 악기도 한두 개 다룰 줄 알고, 심지어 그림까지 나름 그린다. 선생님들도 매우 예뻐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공부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며 옆자리에 앉은 조용한 학생을 괴롭힌다. 처음에는 지우개똥을 만들어 던지기도 하고, 공부 중인 친구를 발로 툭툭 차기도 한다. 심지어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남의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가기도 한다. 강도는 점점 심해져 이제는 지나가는 여학생의 치마를 들추기도 하고, 남학생의 엉덩이를 발로 차기도 한다.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럭저럭 학창 시절을 걸리지 않고 자란 저 아이는 아버지 회사에 들어갔다. 상무라는 이름을 달고 밑에 있는 직원들을 괴롭히기 일쑤다. 저 '우량품' 밑에서 탄생한 아이는 우량품인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맞다. 심은 데 똑같은 게 나온다. 그렇지만 속이 이미 벌레가 파먹어 겉만 번지르르한 쭉정이일 수도, 옹골찬 콩일 수도 있다. 팥도 마찬가지다. 겉모습으로는 알 수 없다.


가정환경의 영향은 있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정환경의 영향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환경뿐이던가? 사람이 살면서 겪는 모든 경험이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아픔을 겪고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지지만, 누군가는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기도 한다.


가령 애인이 바람을 피웠다고 해보자. 누군가는 바람피운 애인을 보고 가슴이 아프지만 그로 인해 바람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알고 배운다. 만나는 사람에게 정말로 온마음을 다하고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누군가는 바람피우는 애인을 보고 연애는 결국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본인도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당연하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본인도 당했는데 나라고 못할까라는 심보다. 바람이라는 상황을 두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어떤 생각과 성품을 지녔는가가 두 사람의 행보를 결정한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진흙을 뚫고 피어난 꽃들이 있다. 척박하디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그들의 노력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에서 피어난 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에서도 잡초는 반드시 자란다. 그래서 나는 환경은 사람을 만드는 일부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저렇게 극단의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불량품은 도처에 널려있다. 자식에서 쉽게 손찌검을 하는 부모, 부모에게 돈을 앗아가는 패륜아, 사회적 물의를 아무렇지 않게 일으키는 유명인뿐 아니라 소소한 불법적 행위나 비도덕적 행위들도 매한가지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주변 사람 모두가 그렇다고 볼 순 없다. 물론 근묵자흑이라고 물들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무조건적으로 나쁘게 바라보기에는 다른 가능성도 충분하다. 되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나쁜 피'를 한탄하며 바르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 악의 씨앗은 존재한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로즈메리의 아기처럼 악마가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의 씨앗이라도 주 양육자의 성향이 중요한 것처럼, 불량품이라 할지라도 어떤 성향을 지녔느냐고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전,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요. 이제껏 아버지가 뭘 하셨어요? 정말 지긋지긋하게. 이제 그만하세요, 제발."


영화나 드라마에 저 대사가 심심치 않게 쓰이는 이유는 자식들이 결국 부모를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며 사랑하기 위함이지만, 실제로 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반은 영화와 같은 이유기 때문이요, 나머지 반은 지긋지긋한 자신의 '나쁜 피'를 벗어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는 분명 문명이 너무나도 발달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인류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하여 이제는 우리가 SF 영화에서나 보던 일들이 가능해졌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말을 알아듣고 해석하며, 로봇은 사람의 표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로켓을 타고 우주로 갈 날이 멀지 않았으며, 불치병이라고 불리던 병들은 차근차근 연구를 해와 난치병에 도달했다. 젊음을 유지시키는 수많은 시술과 수술이 존재하며, 더 이상 종이책과 CD플레이어가 아닌 온라인으로 책을 보며 음악을 듣는다. 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스카이넷처럼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류를 장악하거나, 시저처럼 말하는 유인원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인류의 생각이란 문명의 발달을 따라가기에는 육체의 한계에 머물러있어 아직도 우리는 마녀사냥과 주홍글씨를 즐긴다. 물론 죄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사실 죄인마저도 우리에게는 법률이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다. 그러나 돌을 던지는 것을 막을 순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음에도 선입견과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특히나 보이지 않는 얼굴 아래 숨어 키보드 몇 글자로 타인의 외모부터 가정사까지 모든 것을 비난할 수 있어지니 정도는 더 강해진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나? 나는 스스로의 포용력이 나름 크다고 생각한다. (이건 물론 내 기준이다.) 그렇지만 내게도 분명한 한계선이 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신에게도 한계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치부는 보호하려고 하고, 다른 이의 치부는 들추려 한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수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개인의 영역도 존재하니 말이다. 다만 조금 더 넓고 유들유들하게 세상을 바라봐도 괜찮다는 말이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네잎 클로버는 태생부터 기형이거나 성장시기에 상처를 입은 부위가 자라나 네잎 클로버가 된다고 한다. 만약 지금 당신이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벗어나지 못할 자괴감에 빠졌다면 기억하길 바란다. 당신에게 무슨 상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축하한다. 이제 당신의 성장점에서 이파리가 하나 더 태어날 것이다. 당신은 누구나 찾고 싶어 하는 네잎 클로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당신의 삶에 초록빛 무성한 행운이 항상 함께하기를 빌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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