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먼저인가.
육체가 먼저인가, 정신이 먼저인가.
그릇에 물이 가득 담겨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물을 다른 그릇에 담으면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닌가? 그릇에 물이 아니라 다른 것을 담았다고 해보자. 그럼 그 그릇은 더 이상 물을 담을 수 없는가? 우리의 육체는 그릇이고, 정신은 물이라고 한다면 그릇과 물은 분리되어 있는가? 만약에 그릇이 깨져 새 그릇에 물을 담는다고 해보자. 그럼 물의 본질이 바뀌는가? 또는 그릇에 물이 아니라 커피를 담는다고 하면, 그릇은 형태를 잃어버리는가?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자 노력하며 산다.
우리는 육체라는 고정된 형태를 지니고, 정신이라는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유동체를 지녔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나는 이 말을 매우 좋아하지만, 사실 저 말은 육체에만 집착하는 이들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저 말도 맞다고 생각한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가 괴롭다면 정신이 즐겁기 어렵고, 정신이 시달린다면 육체 또한 마찬가지로 힘을 내기 어렵다.
다만 방법이 있다. 정신이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면, 육체를 고생시키거나 또는 편안하게 만들어 정신을 흩어지게 만들거나 육체가 너무 아플 때는 즐거운 것이나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매우 간단하다.
화가 쌓여 분이 안 풀릴 때가 있다. 가령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무시를 당한다거나, 마음을 담은 호의를 거절당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이다. 이럴 때는 불안이 아니라 화가 올라온다. 이유는 존재를 부정당한 것 같은 불쾌감에서 비롯된다. 나는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섬세하게 나를 살펴주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럴 때는 몸도 경직되고 불편해진다. 마치 빼빼 마른 고목나무처럼 전신이 딱딱해진다. 반대로 몸이 아픈 상태에서는 별것 아닌 일도 화가 잘 올라온다.
만약, 화가 날 상황인데도 내가 웃는다면 그건 그렇게 내게 중요한 사람, 중요한 일이 아니었거나, 내 자아(ego)에 가까운 것을 건드렸을 때가 아닌 거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파악하기 어려워한다.
"도대체가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쟤 원래 이런 건 넘기는 애 아니었어?"
내가 매우 밝고, 낙천적이며, 유들유들하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조금만 날이 서면 당황한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야 한다. 그동안은 리처드 파커(instinct)의 텐트를 살짝 건드려 신경 쓰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중심을 찌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와 리처드 파커의 안정을 위해 대부분은 그냥 차갑게 지낸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선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잘 웃거나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에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웃는 사람들이 무섭다. 부드럽고 강한 사람은 도처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 그들은 생각이 깊고, 마치 조선 양반 어르신네처럼 점잖다.
나는 감정적이고, 역동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논리적이고, 차분한 사람이다.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화를 내고 있어도 논리적으로 맞는 말, 당위성이 정당한 말, 타당한 말을 한다면 수긍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서장훈 님, 데블스게임의 세븐하이님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큰일도 그렇게 큰일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유 없이 무시를 당한다거나 나를 비틀어 비하하는 태도는 어마어마한 분노를 일으킨다. 내 사고체계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인간에 대한 무례로 받아들여진다.
만일, 내가 가족이나 애인처럼 내게 소중한 사람, 매우 친한 친구 혹은 소중한 관계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 내게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할 때, (내가 상황상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그들의 그런 공격적인 태도에 옆에 있는 사람이 일말의 감정 동요, 변화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매우 실망할 것이다. 이유는 그들의 예쁜 그릇 속 물에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미친 사람처럼 싸워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아주 살짝, 눈썹만 꿈틀 해줘도 나는 눈치를 챌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럴 때 나는 우선 웃으며 아무도 모르게 넘어가고, 생각을 따로 정리할 것이다. (물론 매우 불쾌할 경우는 이상 반응이 나타나겠지만 무엇 때문인지 모를 것이다, 알았다면 이미 꿈틀 하지 않았겠는가. 만약에 알았는데도 그랬다고 한다면 최악이다.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하등 없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은 내게 왜 이런 감정 변화가 생겼는지 모를 수도 있다.
내 그릇에는 수많은 감정이란 물길이 담겼다 빠진다. 가만히 두면 모든 물은 알아서 빠질 테지만, 빠지기 전까지는 나의 마음속엔 그 물의 색상에 따라 다양한 동요가 일어난다. 그릇 속 작은 파동은 파도를 만들고, 파도는 거세져 내 그릇을 넘어 넘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럼 그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심한 사람이 좋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세심한 사람은 내가 불편함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나를 배려하고 신경 써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때문에 상대가 내가 무례한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내게 무례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관심 없는 상대에게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의 무시는 큰 분노를 가지고 온다. 내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같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를 때는 주로 걷는다.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잣말로 불만을 토로한다. 차마 누군가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고, 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상황을 스스로 털어내려고 한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 그 자체가 나를 힘들게 하고, 실제로 싸우거나 화를 내면 나는 며칠을 앓아눕기 때문이다. (심지어 혼잣말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조차 무리가 온다. 물론 부당한 일이 있을 때 싸우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매우 잘 싸운다, 물론 그 뒤로 아프지만 말이다.) 그럼 어느샌가 생각은 물줄기를 타고 내 그릇을 빠져나간다. 물론 다시 차오를 수도 있지만, 처음 넘치던 물만큼 그릇을 채우지는 못한다.
나 역시 사람이기에 마음을 비우자, 생각을 비우자 수없이 노력을 하면서도 완전히 비우지는 못한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제까지 타인을 이해해야만 할까. 내가 자신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저 사람들을 내가 계속 연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 맞는 걸까. 물론 그 상대방도 나를 이해하고 있긴 할 것이다. 서로의 선과 에고(ego)가 다를 뿐이다.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더러 있다. 인과 연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참 서글픈 이유이다. 그들에게도 나 역시 시절인연이 될 수 있기에.
그러니 만일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하기를 바란다면, 부디 그 사람이 당신에게 보내주는 편안함에 반드시 응답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 사람이 지치지 않도록 말이다. 당신에게 시절인연보다 질긴 인연의 끈이 닿아 부디 귀한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