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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Nov 14. 2021

[단편] 받지않는 연락처 - 3

탄산수

침실에 어떤 조명도 켜있지 않았지만, 거실의 간접 조명과 창밖 너머에서 들어오는 다른 아파트의 불빛으로 서로의 실루엣이 보였다.

어느새 알몸이 된 남자가 내 목덜미 옆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살짝 두 팔을 벌리고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두 다리를 조심스레 오므린다.


"아... 아!"


하복부로 밀려오는 강렬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두 팔로 남자의 양팔을 때리듯 잡아 밀쳤다. 내가 상상한 느낌과 전혀 달랐다. 절대 해선 안 될 무언가를 해버린 탓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듯 온몸의 신경의 곤두서고 사지가 경직되고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내 반응에 남자는 더 당황한 듯 보였다.


"너 처음이야?"


아직 남자의 양팔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나는 얕은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자는 내 위에서 옆으로 몸을 천천히 내려놓고 나와 같이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아니, 너도 참"


남자는 내 이마에 잠시 손을 올리더니 얼굴로 손을 쓸어내렸다. 잠이라도 들길 바란 걸까. 나는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아 다리를 배 쪽으로 당겨 몸을 웅크리고 숨을 천천히 고르고 있었다.


"진짠가 보네. 아니 보통 처음은 특별하게 하고 싶어 하지 않나? 무슨 생각으로 가만 있었던 거야?"


남자는 실소를 섞어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글쎄요."


사실 나는 첫 경험이 그렇게 특별하게 여겨야 하는걸까라고 생각했었다. 첫 번째나 두 번째나 백스물세 번째나 다 한 번의 경험 아닌가. 처음이 소중한 거라면 그다음도 소중한 것이고, 다음번이 그저 그런 의미라면 처음도 그 정도의 의미를 있으면 충분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이 남자에게 내가 오랜 시간 정제해온 생각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아예 머리를 괴고 옆에 누워 잠시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시선은 느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제는 넓고 깨끗한 천장을 보며 저기 뭘 붙이면 예쁠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아파하니까 못하겠다."


남자는 가볍게 내 어깨에 입술을 대고 웅얼거리더니 몸을 일으켜 내 옷가지를 내 옆에 가져다주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술은 진작에 깼다. 오히려 평소보다 정신이 더 말똥말똥했다. 옷을 입으면서도 아직 긴장이 덜 풀린 팔다리를 억지로 놀리느라 평소보다 2배는 느리게 움직였다. 밤이라 남자가 대로변까지라도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고 집을 나왔다. 혼자 걷고 싶었다.


이게 좋다고? 처음이라 그런 건가. 이게 익숙해질 수 있는 통증이라고? 오늘 내 생애 처음으로 섹스할 뻔했다는 사실보다 그간 내가 그려온 쾌락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났다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성(性)이 나쁜 게 아니라면 왜 처음은 이렇게나 아프도록 몸이 설계된 것인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론 제대로 섹스를 못 해본게 아쉬웠다.


그 뒤로 남자에게 연락이 왔지만 쏟아지는 팀플과제 멤버들과의 약속때문에 못 만난 날이 두 어번, 오늘 밤 다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양념치킨과 생맥주 500cc 두 잔이 나왔다. 땅콩 가루가 솔솔 뿌려진 양념치킨은 맛의 불모지인 이 신도시에서 이곳을 안주맛으로 승부 보는 호프집이라는 인식을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다.


"요새 많이 바쁜가 보네."

"과제가 많네요. 한동안 괜찮다가 갑자기 몰려서 좀 정신없어요."

"그것도 추억이지. 나도 중앙도서관에서 밤새고 그럴 때가 있었는데. 오늘은 여유 있고?"


순간, 오늘 밤늦게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네, 급한 건 끝냈어요. 그러니 나왔죠."


그리고 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의 대학시절을 얘기하며 지금 나의 대학시절이 얼마나 일장춘몽같은 시기인지를 재차 강조하며 말했다. 남자는 이처럼 추억을 회상하는 말을 자주했다. 사회에서 그리 나이 많은 편도 아닐텐데 상대적으로 어린 나를 보면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는 걸까 궁금했다. 나는 지금과 미래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했다. 이 남자와 먼 미래를 꿈꾸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껏 혼자만의 시간을 쪼개 만났는데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남자에게는 두마디 말할 것을 한마디만 하게 되었다.


술과 안주가 나오니 자연스레 말은 줄고, 술이 술을 불러 취기가 혈관을 통해 확장해갔다. 둘 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대화를 이끌어가는 남자 덕분에 순간의 정적조차 숨을 고르고 트랙을 따라 달려가는 마라토너처럼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새 2차로 남자 집으로 향했다.


"저 물 좀 주실수..."

"어, 냉장고에서 꺼내먹어. 탄산수도 있고"


괜히 남의 집 물건 만지는 게 조심스러워서 부탁했건만, 남자는 소파에 앉아 우편물을 확인하는 시선을 거두지도 않고 말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정말 물 가득, 탄산수 가득, 맥주 몇 캔이 빼곡히 냉장고를 채우고 있었다. 아니 이걸 냉장고가 채워져 있다고 해야 하나, 비어있다고 해야 하나. 대열에 맞춰 서 있는 탄산수 중 가장 앞에 있는 녀석을 골라잡았다. 혹시 무슨 변태적인 취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생각이 복잡해졌다. 사실은 살짝 더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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