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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Nov 04. 2021

[단편] 받지않은 연락처 - 2

만남

저녁 8시가 넘은 바깥 공기에는 온기가 남아있다. 6월인 지금, 올해도 역시 '역대 최악의 폭염'이 닥칠 거라는 뉴스가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문제인 건지 옛날에 기상관측기술이 정확하지 않았던 건지 어떻게 매년 이렇게 역대 치를 찍는지 신기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큰 대단지는 아니다. 자취방을 구해줄 겸 투자목적으로 매매까지 생각했던 엄마와 이모는 그 이유로 투자가치가 있는 아파트까지는 아니라고 판단해 전세로 집을 구해주셨다. 나에겐 단지가 작아 집 앞 버스 정류장을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좋았다. 호프집까지도 금방이다.


호프집에 들어서니 조용한 바깥과 다르게 아이돌 노래가 흘러 약간 산만하다. 왼쪽 귀퉁이에서 한자리 띄운 좌석에 젊은 남자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 보고 계세요?"

"어 왔네. 그냥. 치킨은 반반하고 생맥 시켜놨어. 괜찮지?"


무엇을 보았냐는 질문에 '그냥'이란 맞지 않는 답이다. '그냥'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좋죠"

"넌 뭐 하고 있었어"

"오늘 학교 갔다 오고 그냥 쉬고 있었어요."

"한창 바쁠 때 아냐? 왜 친구들 안 만나고 이 좋은 밤에 집구석에 있어"

"좀 쉬고 싶을 때도 있죠"


실제로 좀 쉬려고 했다. 학기 초라 같은 과란 이유로 이름 모를 사람들이 불쑥 옆으로 다가와 '어, 신입생이구나?'라며 연락처를 물어보고 온갖 술자리에 불려 다니고, 그 와중에 교수님마다 과제는 내주셔서 정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게 대학생의 낭만이구나 싶어 불러주는 술자리마다 참석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리쳐야 알아들을 수 있는 술집에 모여 다음날 머리가 깨질 각오로 술을 권하고 마시는 데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술 마실 때는 가까워졌다 며칠 후 지나가다 마주치면 어색하게 인사하는 그 순간이 싫고 의미 없게 느껴졌다. 상대가 반갑게 인사해도 나는 상대가 친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데 살갑게 대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맘껏 놀아라. 나중에 그렇게 놀 날도 없다."

"다 그러더라고요"


남자가 살짝 몸을 뒤로 젖히고 머리를 넘기며 말한다. 직모에 어깨에 닿을 듯 말듯 남자치곤 꽤 긴 머리다. 남자는 32살, 나와 띠동갑이다. 그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내가 어쩌다 이 남자랑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잠깐 실소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걸 참게 된다.


남자는 그리 크지 않은 키지만 어깨가 넓고 잔 근육 있는 슬림한 체형에 얼굴이 작아 비율이 좋다. 짙은 눈썹과 쌍꺼풀 없는 눈매 아래로 콧대가 높다. 콧망울은 날 서지 않고 야무지게 동그랗다. 입술은 약간 과하게 두꺼운데 입술에 침을 바르는 습관때문인지 항상 빨갛고 윤이 난다. 사람들 모이는 자리가 있으면 꼭 한두 명은 남자에게 잘 생겼다 한마디 했고 남자는 그때마다 익숙하다는 듯 배시시 웃어보였다.




동네 모임에서 이 남자를 처음 알게 되었다. 조용한 곳이다 보니 성격이 활발한 사람들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긁어모아 왁자지껄하게 놀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아파트 단지를 들어서는 길에 지나가는 젊은 아주머니랄지 나이 좀 있는 아가씨랄지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

'어, 대학생이야? 여기 대학생도 살아? 잘됐다. 우리 오늘 이 주위 아파트 사람들 모임 있는데 여기 와요. 아 진짜 그냥 노는 데니까 한번 와서 놀다가. 학생이니까 돈 내라고 안 할게. 그냥 놀다가 있다 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며 얼마나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냥 동네 분위기나 익혀보자라는 생각에 그날 저녁 모임 장소로 나가게 되었다.

분명 시간 맞춰갔건만 막상 도착해보니 이미 다들 거하게 취해있었고 나이대는 나보다 훨씬 많은 아줌마 아저씨가 대다수였다. 그냥 적당히 인사하고 안주나 한두개 먹고 나오려던 찰나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뭔가 여기 올 나이대는 아닌 거 같은데? 몇 살이에요?"

"저 20살이요. 저도 이런 분위기인 줄은 몰랐어요. 몇 살이세요?"


나보단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남자도 20대인 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전 32살이에요. 20살이면 번지수 한참 잘못 찾았네. 공짜 밥 먹는다 생각해요. 저도 오늘 심심해서 나와봤어요. 이 근처 살아요?"


상당한 동안이라고 느꼈다. 여드름 한 번 안 나본 것 같은 피부와 곧게 뻗은 머리칼이 한몫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난 직모에 머릿결 좋은 남자를 좋아했다.


"네."

"끝? 말이 많은 편은 아니구나. 어쨌든 반가워요. 지금 정신있는 사람 우리 둘 밖에 없어요. 짠해요."

"아 네."


그렇게 술 한 두잔 하고 피상적인 얘기가 오가다 말을 놓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처음 몇 마디 나눌 땐 나도 말을 놨지만 이내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너 편한대로 말해라 했고 난 계속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 그 어떤 이성적 호감과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잘생겼다 생각했지만, 호감을 느끼거나 사람을 좋아하는 건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뒤로 몇 번 더 술을 마셨다. 우린 평소에 절대 문자든 카톡으로 시시콜콜한 일상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다 언제나 남자 쪽에서 술 한잔하자는 연락이 왔고 내가 시간이 되면 만나고, 아니면 말았다. 만나서 하는 얘기도 서로의 얕은 수면을 훑는 정도였다. 서로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술을 기울였고 어느 정도 취하면 헤어졌다.

어느 날 밤은 남자가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동네 갈만한 술집들은 하나씩 돌다 보니 새로운 곳을 마땅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가는 게 약간 무서웠지만 설렘도 있었다. 어떤 곳에 살까. 어떻게 살까. 오늘 술을 얼마나 먹으려나. 위험한 건 아닌가.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집으로 가겠다고 하고 주소를 받았다.


남자 집은 내가 사는 곳에서 4~5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단지도 꽤 커서 집에서 느긋이 걸어가니 30분은 걸렸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을 많이 가본 건 아니었지만 정말 전형적인 그런 집이었다. 34평형대 혼자 살기에 꽤 큰 집에 살며 가구는 별로 없었지만 컴퓨터 책상과 데스크톱만큼은 공을 들여 조립한 흔적이 보였다. 신축 아파트인만큼 드레스룸이 있고 개방된 형태의 붙박이장이 갖춰져 있었지만, 옷가지가 많지 않아 빈 곳이 많고 드레스룸이라는 말이 허세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미리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안주는 노가리, 볶은 땅콩, 말린 바나나칩, 양념치킨이 있었다.


"넌 뭐 안주 이것저것 있어도 얘네만 먹더라. 그래서 샀어."


맞다. 편식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면 보기 싫다 싶을 만큼 깨작거린다는 말을 듣는 나였다. 그 버릇이 술안주를 먹을 때도 드러났었나 보다. 그래도 내가 뭘 잘 먹고 안먹 는지는 봤구나 싶어 조금 고마웠다. 사실 만날 때마다 얻어먹어 미안함이 더 컸다.


"제가 그랬어요? 저도 몰랐네요. 근데 제가 매번 얻어먹네요. 다음엔 제가 살게요."

"네가 산다고? 그거 너희 부모님이 사시는 거잖아. 됐어. 뭐 대단한 거 먹냐, 그 정도는 있어. 그러니까 부르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여느 때처럼 남자는 소맥을 말아 마시고 나는 맥주만 마셨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남자는 나의 손을 끌어 침실로 데려갔고 나는 침대에 눕고 남자는 옷을 벗었다. 한 손으론 바지를 벗고 한손으론 침대 협탁에서 콘돔을 찾았다. 그러다 잠시 멈추곤 나를 바라봤다.


"너 괜찮아?"

"이제 와서요?"

"얘 봐라, 그럼 한다."


콘돔을 내 머리맡에 둔 남자는 내 옷가지를 하나씩 벗겼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침실 창밖을 바라봤다. 빼곡한 아파트들 중 어떤 곳은 전 층이 불이 다 들어와 있고 어떤 곳은 불이 하나도 켜지지 않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전층이 켜진 곳도 어떤 목적으로 불을 켜둔 것일 뿐 누군가 살기 때문에 켜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상하다. 이거 되게 떨어야 하는 순간 아닌가. 왜 이렇게 평온하지.' 이미 상반신에 걸쳤던 옷과 속옷은 다 사라지고 이제 바지로 남자의 손이 갈 때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처음인데 처음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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