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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Nov 28. 2021

[단편] 받지않는 연락처 - 4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니 자잘한 거품 방울이 식도를 타다닥 자극했다. 극도로 낮게 설정된 냉장실 온도 탓에 내장이 서늘해지는 기분마저 들었지만 내 속은 오히려 더 뜨뜻해지고 있었다. 트림이 나올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물을 몇 번 나눠마시는 중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손을 뻗어 탄산수를 가로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왜 그러지?싶어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손을 잡아 침실로 나를 이끌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뜨뜻한 속은 마음을 녹이고 녹여 용암같이 찰랑거리고 있었고 하반신은 지난날의 기억 때문에 슬슬 뻐근해져 오기 시작했다. 침대 옆까지 오자 남자는 내 어깨를 눌러 나를 침대에 뉘였고 내 몸은 흐르듯 침대 이불 위로 내려앉았다. 남자의 행동은 이전보다 훨씬 느렸다. 나에겐 순간인 듯 지나갔지만, 옷을 하나씩 벗고 벗기는 과정이 훨씬 더뎠고 그 과정에서 나는 하반신의 긴장이 풀려가는 걸 느꼈다. 남자는 내 어깨와 허벅다리를 쓸어내렸고 나는 방금 마신 탄산이 순간적으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올 것 같아 숨을 참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콘돔까지 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내 등 뒤로 두 팔을 넣어 나를 확 끌어안아 몸을 밀착시켰다. 이번엔 정말 탄산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을 꼭 닫았다.


'힘 풀어'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내려앉은 남자의 목소리에 최면이 걸린 듯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무릎을 세웠던 두 다리마저 쭉 뻗어버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번엔 진짜 섹스를 하게 될 것이라 느꼈다. 아니, 이번엔 내가 끝까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자의 어깨 양쪽을 꼬옥 잡았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섹스를 하는 동안 생각보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다 이 집에 왔을까, 무슨 샴푸를 쓰길래 머리칼에서 이렇게 좋은 향이 나지, 아 생각보다 너무 아프다. 이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니겠지. 만날 때마다 말하던 본인의 한창때 만난 수많은 여자와도 이렇게 했었겠지.

그 와중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남자의 소리가 너무 자극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한숨 같은 신음이 나왔다. 남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그 모습을 아래에서 바라보는 건 꽤나 즐겁고 짜릿했다. 난 이 순간을 위해 머릿결 좋은 남자를 찾았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는 절대 입을 맞추지 않았다.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감이 있어 편리했다.

어느 순간 남자는 '아'라는 짧은 탄식을 내뱉고 관계가 끝났다. 사정하고도 한참을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침을 한 번 삼키곤 씻고 오겠다 했다. 나도 빨리 씻고 싶었지만 움직이는 건 싫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이미 서로 다 본 몸이지만 나체로 침대에 누워 기다리자니 민망해서 이불을 살짝 끌어당겼다. 이불로 몸을 두르자니 이런저런 타액을 묻히는 것 같아 최대한 마른 피부 쪽만 덮었다. 덮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곧 남자가 돌아왔다.


'화장실 써'

'네'


남자는 내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섹스가 끝났음에도 하반신은 아직 열린 상태인 듯 뻐근하고 계속 불쾌한 아픔이 툭툭 건드렸다. 아무 생각 없이 샤워부스 수전을 위로 들어 올려 물을 트니 얼음장처럼 차갑고 강한 수압의 물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여름이라지만 이렇게 찬물로 샤워할 수 있다니. 좀 더 따뜻한 물이 나오도록 세팅한 후 물줄기를 한참을 맞고 있었다.

생각보다 첫경험은 급작스럽고 아프고 덜 황홀했다. 그렇다고 아쉽거나 속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상상을 먹고 몸집을 불린 풍선 괴물의 바람이 빠져 쪼그라들어, 내 앞에서 실체를 드러낸 것 같았다. 그리고 너도 별거 없네하고 내가 코웃음 쳐줄 만한 녀석이 돼버린 그런 이상한 승리감이 들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남자는 옷을 다 입고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괜찮아? 술 한잔할래?'

'아니요. 집에 갈래요'

'지금 바로? 더 있다가 가지 왜'

'집에서 쉴래요'


남자는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당연히 내가 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잠깐 멀뚱히 쳐다보다 시선을 차 키로 옮겼다.


'그럼 술 안 먹었으니까 차로 데려다 줄게'

'아뇨, 그냥 걸을래요'


이제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기분이 안 좋아?'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 그냥 혼자 바람 좀 쐬려고요'

'혼자? 알았어. 그럼 아무 말 안 하고 집에 데려다 만 줄게. 요새 밤길 진짜 위험해'


순간 그쪽만큼 위험하겠어요라고 장난스레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삼켰다. 말을 내뱉기 조금 귀찮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분명히 느껴졌다. 내 안에서 이 남자에 대한 어떤 작은 흥미나 관심마저 서서히 사그라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이리 마주 서서 귀여운 실랑이를 하는 것마저 성가시다는 기분이 들었다.


'네, 그럼 데려다 주세요'


남자의 차안에는 디퓨저 냄새로 산뜻함이 맴돌았다. 나는 조수석 창밖을 바라봤다. 달무리가 껴서 달빛이 흐렸다. 비가 오려는 건가. 운전하면서도 남자가 중간중간 내 쪽을 보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모른 척 창밖만 바라봤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심지어 남자의 차안에 있었지만 나 외에는 신경 쓰이지도 쓰고 싶지도 않았다. 5분 남짓했던 드라이브는 그 어느 때보다 어색했다.


'감사합니다'

'아, 응 조심히 들어가'


차에서 내려 뜨뜻한 여름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자 내 안에 남아있던 남자에 대한 마음이 쑤욱 하고 밀려나는 것 같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약간의 죄책감과 피로감이 몰려왔다. 뭐지, 나 이렇게 사람에 대한 마음이 갑자기 바뀌는 사람이었나. 이상했다. 설마, 이제 자봤으니 됐다는 거야? 아니, 그래도 처음 잤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생각을 멈췄다.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마음가짐이 떠올랐다. 처음에 너무 큰 무게와 기대를 두지 말 것. 소중하다면 모든 순간을 소중히 할 것. 아니라면 처음 또한 아닌 것. 그리고 이 남자는 아니라는 결론이 머릿속을 강하게 타격하며 들어왔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남자였다. 나는 진동이 꺼지도록 버튼을 한 번 누르고 주머니 속에 집어 넣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1주일 후, 4달 후 남자에게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물론 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화번호를 지우지도 않았다. 전화가 오면 '그 남자'라는 걸 알아야 했기에 지울 수는 없었다. 길에서 남자가 몰던 연식과 모델의 차를 보면 순간 눈길이 잠시 멈추긴 했다. 그렇다고 놀라거나 기쁘거나 당혹스럽진 않았다. 한번도 그 남자의 차였던 적도 없었고 사실 그렇다 한들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가끔 연락처를 정리하려 주르룩 스크롤을 내리면 그 사람의 이름이 스쳐 갔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한다.

과거에 빠져 사는 사람은 작아 보이는구나, 과연 나는 언제를 사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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