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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Feb 20. 2022

[단편] 코르셋과 셔츠

당신의 페티시

팬티만 입은 여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옷장을 여닫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여자는 결벽적이다 싶을 만큼 각이 선 남자의 검은색 셔츠를 얼른 눌러주고 싶었다.


'아, 여깄네'

남자는 검은색 코르셋 두 개를 꺼내 여자 앞에 보여준다.


'어느 거부터 입어볼래?'

'왼쪽?'

둘 다 검은색이고 차이라고는 허리를 감싸는 면적 정도밖에 없어 보여 고민 없이 골랐다.


남자는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가 코르셋을 여자 앞으로 넘긴다.

여자의 복부를 감싸도록 대고 양옆의 끈을 힘껏 잡아당긴다.


'아'

'미안, 아파?'

'아니'

훅 들어온 압박감에 놀랐지만 못 참을 만큼의 불편함은 아니다.

남자는 단단히 끈을 묶고 여자를 일으켜 화장대 거울 앞에 세운다.


'생각보다 코르셋이 힘이 없네. 저거 입어보자'

여자도 동감이었다. 그냥 끈이 있는 넓은 벨트 같았다.

남자는 코르셋 끈을 풀고 두 번째 코르셋을 여자 몸에 둘렀다.

두께감이 있고 힘 있는 재질이었다. 양옆에 달린 끈도 훨씬 길다.


코르셋이 허리에 둘리고 남자가 끈을 당기자 여자는 '이거다' 싶었다.

신축성은 전혀 없이 딱딱하고 끈이 길어 남자가 손에 끈을 한번 휘감아 당기자 갈비뼈를 순식간에 압박했다.

호흡하기 훨씬 힘들어졌다.


'너무 세게 했나?'

'아니'

'그럼 좀 더 조여도 돼?'

'해봐'

남자는 여자의 등 뒤에서 끈을 한 번 더 당긴다.

조일 여유가 별로 없어 손가락 사이에 끈이 파고들도록 힘주어 당겼고 여자의 몸이 한번 앞뒤로 흔들거렸다.


'여기까지만'

'어어, 미안'

남자는 순간 못 할 짓을 하는 거 같은 미안함에 여자 어깨서 손을 올리며 사과했다.

그렇다고 코르셋을 풀어주지 않고 처음보다 훨씬 길게 늘어뜨려진 끈을 매듭지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여자는 허리를 놀리며 일어날 수 없어 어정쩡하게 일어나 화장대 거울 앞에 섰다.

허리 양옆은 비정상적으로 움푹 들어갔고 가슴 모양으로 파인 코르셋 윗부분은 여자의 작은 밑가슴과 닿지 않아 공백이 있었다.


'어때?'

'웃기네'

여자는 팬티에 코르셋만 걸치고 거울 앞에 선 자신이 정말 웃겨 보였다.

가슴이 좀 더  커서 코르셋 윗부분을 덮을 정도였으면 달랐으려나 싶었다.


'맘에 안 들어? 난 너무 좋은데'

남자는 침대에 앉아 여자의 두 팔을 잡고 여자의 허리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여자의 복부 중앙에 남자 머리가 닿았다.


'오늘 넥타이 안 했네'

'하고 올까?'

'아니'

'요새 회사에서도 넥타이까지는 잘 안 하니까, 다음에는 챙겨올게'

남자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여자를 올려다본다.

여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까칠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선뜻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말투가 딱딱하고 표정도 많지 않다.

그나마 그를 오래 보아온 친구들은 그래도 속내가 까칠한 녀석은 아니라며 이해해줬다.

친구들이 모이면 '우리니까 저 새끼 성격 받아주지, 회사 다니는 게 용하다'라며 말했다.

여사친들은 '너 여친한테는 안 그러지?'라고 농담 반, 진담 반 걱정을 했다.

그때마다 남자는 '난 일을 존나 잘하니까', '네 남친이나 신경 써라'라고 받아쳤다.

말은 그래도 친해질수록 장난기가 많고 사람 좋아하는 남자였기에 친구들이 많았다.


여자는 조금 달랐다.

어느 자리에서도 기이하다 싶을 만큼 웃음소리가 크고, 소위 분위기메이커역할을 했다.

사무실에서는 여자가 재밌고 외향적인 사람이라 평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 누구랑 친하지? 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와도 어울렸지만, 누구와도 친하진 않았다.

친함의 역치가 높은 여자는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심지어 친해질수록 말수가 줄어들어

친해지기 전, 후의 모습을 모두 아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여자를 이중인격이라 놀렸다.



이 둘이 만나면,

남자는 조곤조곤 자신의 일상을 말하고 여자는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여자는 실로 감성적인 남자가, 남자는 모든 일에 담담한 여자가 신기했다.

와중에 침대 위 이야기에는 둘 다 건조하리만큼 솔직한 편이라 서로 잘 맞는다 생각했다.


남자가 여자의 등 뒤에 손을 올려 화장대 쪽으로 살짝 밀었다.

그리고 여자의 왼손을 잡아 화장대 위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등을 아래로 지그시 눌렀다.

여자는 저항없이 살짝 웃으며 화장대 위로 허리를 숙였다.


'아, 이러면 나만 좋나?'

남자는 화장대 위로 엎드린 여자 위로 몸을 기울여 밀착시키고 여자 귀에 대고 물었다.

기껏 여자가 좋아하는 셔츠를 입고 왔기에 아차 싶었다.

그 새 왼손은 여자의 가슴을, 오른손은 여자의 허벅지를 꽉 쥐었다.

이렇게 묻긴 했지만, 슬슬 남자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아니, 그냥 하자'

등 뒤로 느껴지는 남자의 몸과 다르게 낮은 목소리의 나긋한 말투가 기분 좋았다.

와중에 바스락거리는 셔츠가 맨살에 닿자 여자는 기분이 야릇해졌다.


여자는 가끔 남자가 너무 조심스럽다고 생각했다.

체위를 바꾸거나 새로운 걸 시도해 볼 때마다 남자는 여자의 반응을 수차례 살피고 괜찮냐 물었다.

한 번도 안 괜찮은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조금 더 강하게 여자를 밀어붙여 줬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몇 번이나 관계가 끝나고 여자가 남자에게 얘기했었다.


'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돼. 싫으면 내가 말할게'

'아는데, 혹시나 해서'


여자보다 키도 몸집도 훨씬 큰 남자지만, 관계가 끝나면 항상 남자가 여자에게 안겨있었다.

물론 남자가 다 안기지 않아 자세가 어정쩡했지만 둘은 매번 10여 분은 그러고 있었다.


한 번은 남자가 물었다.

'왜 맨날 내가 안겨있지?'

'어, 그러네. 안기는 거 기분 좋지 않아?'

'좋지. 너한테 안기는 건'

'그럼 됐어.'


10분,

격렬하게 섹스를 하는 순간보다, 그 시간에 둘은 이게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자는 몸을 일으켜 화장대 위에 엎드린 여자와 거울 속 자신을 번갈아 보았다.

코르셋에 의해 평소보다 훨씬 잘록하게 들어간 여자의 코르셋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여자의 숨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게 느껴졌다.

남자는 역시 끈을 너무 조였나 싶었지만, 이 구도가 너무 맘에 들어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근래에 인터넷 쇼핑으로 소비한 돈 중에서 가장 의미 있게 썼다 싶었다.


평소면 최소 두 번은 체위를 바꿔가며 섹스를 했겠지만 이번은 끝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관계가 끝나자마자 남자는 코르셋 끈부터 찾아 풀었다.


'하아...'

여자가 그제야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물속에 잠수하다 튀어 올라온 사람처럼 몇 번을 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연달아 크게 심호흡하는 소리를 듣자 남자는 다시금 미안함이 몰려왔다.


'답답했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여자 옆구리에 코르셋에 눌린 자국이 보였다.


여자는 품에 안긴 남자의 머리를 감쌌다.

'괜찮아, 좋았어?'

'응, 너무. 너는?'

'나도 좋았어'

'음... 오늘은 나만 좋았던 거 같은데'


'네가 좋은 게 좋아'

여자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좋다는 건 별로다'

남자도 진심이었다.


'그럼 왜 맨날 좋았냐고 물어봐'

남자는 이을 말을 찾지 못했다.


'다음에 코르셋 또 할까?'

'어, 나 셔츠 하나 더 사려고'

'나 때문에? 그만 사도 돼'

'싫다는 건 아니네'

이번엔 여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 전 여자는 남자의 옷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귀기 전 분명 셔츠는 카라가 거슬려 답답하다고 했는데, 옷장 윗줄에 티셔츠 3장을 빼곤 전부 셔츠로 채워져 있었다.

'전 셔츠 좋아해서요'라는 대답 한번을 법칙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셔츠를 입어야만 좋다는 건 아니었는데. 남자는 단순한 면이 있었고 여자는 그 점이 좋았다.


그렇게 숨을 고르길 10분, 남자는 잠이 쏟아졌다.

사실 관계가 끝난 직후부터 곯아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관계가 끝나자마자 잠드는 건 아닌 것 같아 몸을 뒤척거리며 잠을 쫓아내고 있었다.

여자는 진작 눈치챘지만 이렇게 대화 나누는 순간이 좋아 일부러 모른 채하고 있었다.


'빨리 자, 내일 출근해야지'

'어... 잘자'

남자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여자에게 가볍게 입 맞추고 여자 품에서 벗어나 베개를 찾아 밴다.

씻을 기운도 없다.

베개에 머리가 닿고 채 2, 3분이 채 지났을까 남자는 코를 살살 골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어두운 방 안,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밤빛에 비친 남자의 실루엣을 보고 있노라면 만성적인 불면증을 가진 여자라도 잠이 솔솔 오는 기분이었다.


여자도 '내일 씻지 뭐'라고 생각하고 잠들기로 했다.

남자에게서 빌려온 잠기운을 잃을세라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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