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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Mar 08. 2022

떠나는 마음

있을 때 잘하자

출근 알람이 울리기도 전 이른 아침, 모바일 사내 메신저 알람이 와있었다.

'3월 7일, 입사 5주년을 축하합니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고 어색한 흰색 셔츠와 검은색 재킷, 정장 치마를 입고 안개 냄새 짙은 아침 공기를 가로지르며 안국역 앞, 면접장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러 가던 그날이 스쳐 간다.

면접장에 도착해 정해진 자리에 모두 앉으니, 공채 인원의 일부만 모인 날임에도 큰 대학 강의실만 한 공간이 가득 채워졌다. 옆 사람과의 대화조차 금지했기에 다들 정막이라는 그물망에 갇힌 물고기 시체들처럼 각자 몸만 비틀거리고 입은 조용했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주었지만 포장지를 뜯지도 못했다. 모든 이의 면접이 끝나니 저녁 7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제야 금언해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면접자가 가방에서 귤을 꺼내 건넸다.

'점심도 안 드시던데 배 안 고프세요? 이거라도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뭐 먹으면 체할 거 같아서 안 먹었는데 먹을 걸 그랬나 봐요'

'그러셨구나. 전 떨어졌어요. 기술면접 때 제가 얘기했어요. 다음에 와서 잘해보겠다고'

'아 진짜요? 혹시 모르죠. 그런 솔직한 모습이 가산점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것도 정도가 있죠. 전 진짜 질문 하나도 대답 못 했거든요 하하'


세상에, 그렇게 면접을 말아먹고도 옆 사람에게 귤을 건네는 여유라니, 호인이다 싶었다. 마지막 인사는 합격해서 회사서 봅시다였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분이 면접을 통과할 확률은 희박해 보였다. 그리고 입사 이래 마주친 적은 없었다. (아니면 서로 다른 조직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수도)


그렇게 긴장된 고비를 넘겨 입사하고 정확히 5년 뒤인 오늘은

팀장님께 이직하겠다고 말씀드리기로 한 날이다.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떠나겠다 마음먹고 시작한 이직 준비지만 정말 떠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사무실 온 자리에 스며든 추억들이 말을 걸었다.

'진짜 가려고? 여기도 괜찮은데. 가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제 발로 나가면 못 돌아온다.'


그때마다 대답했다.

'이미 마음이 떠났다.'


재택근무 중이시던 팀장님과의 대화는 30여 분 정도 이어졌다.

팀장님과 전화로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

조용한 회의실에서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준비했던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고 사무실로 복귀하시면 그때 한 번 더 얘기하기로 했다.


그러고 본격적으로 연락이 뜸했던 동기들이며 주위 사람들에게 이직 사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사내 메신저에 답하느라 오후 시간이 휘리릭 지나갔다.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회사는 사람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가 없었다.

살아보니 그건 상당한 운들의 연속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좋은 사람과 좋은 기억을 쌓는 경험은 때론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게 만들 만큼 크나큰 행복이자 본능적인 기쁨이다.


그런데도 여러 매니저분과 팀장님과 면담을 하며 생각이 바뀌지 않았던 건 이직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 최소한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진지하게 일을 했기에 가능했다.

물론 고과도 좋았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평가란 내가 제어 가능한 부분이 아닌지라, 그저 진심으로 일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선택의 갈림길에서 떠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후련할 수 있었다.

이번 이직 경험은 그런 면에서 단순히 회사를 바꿨다, 몸값을 올렸다 이상의 교훈이었다.


난 나의 최선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기에 이 회사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는지,

이직 준비를 최선을 다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매 순간 진심이었다.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정말 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매사 진심으로 대하라 하면 진지충이니, (10)선비니, 미련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에 열심히여 본 사람은 안다.

때론 미련스레 매달려 봐야 포기도 깔끔하게 할 수 있다.

깔끔하게 접을 줄 안다는 건 굉장한 용기자 상당한 수준의 자기 객관화를 요하는 일이다.

이는 일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나의 자존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제 이 회사에 대한 내 마음은 김영만 선생님이 접은 종이처럼 깔끔히 접혔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마음을 접게 될까.

약간 서글프다.

하지만 마음의 공백은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다.

그를 위해 앞으로도 진정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하자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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