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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Apr 24. 2022

사람 없는 관광도시를 누리는 자의 여유

퇴사 여행일지 2 - 아쉽지 않아

통영의 아침은 뜨거웠다.

숙소 거실 통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바닷물에 부딪혀 들어온 반사열, 난방비 걱정 없다는 생각에 적정온도를 잊고 올려놓은 보일러 설정 온도 탓에 집안 온 창문을 열어젖히며 아침을 맞이했다.


뜨겁게 달구어진 몸으로 쉼 없이 걸었다.

숙소에 놓인 주인장 가이드를 보고 20분여 거리에 있다는 이순신 공원을 가보았다. 그런데 주인장님이 축지법을 쓰시는 건지 내가 거북이걸음인 건지 약 40분은 걸어 공원에 도착했고 가파른 공원을 오르고 내리면서 오전을 보냈다. 간만에 허벅지 근육이 어디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해안가와 시내를 걸어 다녔다.

충무김밥과 굴 코스를 먹고 그러고도 자리를 옮겨 맥주를 몇 잔을 더 들이켰고 이 날도 거하게 취했다.

평소라면 인파로 북적였을 거리는 위드 코로나의 영향이 아직 덜 미친 탓인지 한산하다 못해 식당을 들어서는 게 조심스러웠다.


이후 여행기는 그때그때 짤막하게 남긴 글들로 남겨두려 한다.

가끔은 기억 속 몇 개의 모습만으로 두고 싶은 날들이 있다.

왜곡이 생기더라도 나만의 필터를 덧씌운 나날의 기억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아래 문단은 글을 쓰던 순간의 시제 그대로 두고자 한다.



여행의 3일 차 거제도


거제도의 한 카페 루프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는 호텔이란 간판을 단 모텔과 장승포항이 어우러져 있고 뒤로 이어지는 산언덕 배기에서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배산임수의 절대적 풍수 조건을 갖춘 이 카페 덕에 거제에 대한 첫인상이 산뜻했다.

어제는 통영의 해안가를 노닐고 오늘은 루프탑 카페에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거제도의 바람의 언덕 뒤편에는 신선들이 놀고 갔다는 신선대가 있다.

그곳에 가볼까 생각이 들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현대의 신선놀음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여행은 꼭 즐겁지만은 않다.

하루 종일 먹다 보니 몸에 살이 급속도로 불어나는 것도 느껴지고 그 와중에 어마어마하게 걷다 보니 종아리와 허벅지에 알이 배기고 몸이 부어 자고 일어나도 평소의 컨디션의 70% 정도밖에 회복이 되지 않는다.


돈 써가며 고생하는 와중에도 이 휴식이 조만간 끝난다는 사실은 오히려 마음 한편을 무겁게 만든다.


모든 즐거움은 끝난다.

모든 괴로움은 끝난다.



여행 5일 차 경주


경주에 왔다

현재 시각 : 오후 4:34분

장소 : terelj with pony라는 카페.


오전에 불국사를 다녀왔다.

요 며칠 날이 갑자기 더워지면서 불국사 크지 않은 내부를 한 바퀴 돌았더니 온 몸에 기운이 쫙 빠져버렸다.

아침에는 전날 먹다 남은 황남빵 하나를 먹고 불국사를 삥- 돌고 너츠 쿠키 하나와 시원한 캐모마일을 마셨다. 불국사에서는 선물용으로 삼재에 대한 액운을 막아준다는 팔찌를 하나 샀다.

불국사의 기운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를


시원한 차 한 잔까지 마셨더니 몸이 퍼져버렸다.

아직 경주의 교촌마을과 안압지를 돌아야 하건만 이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30-40분 앉아 있어도 종아리의 피로가 사라지지 않는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식도락이지만 먹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자꾸 달달한 간식만 당긴다.

이제 여행을 정리할 때가 온 것 같다.

내 몸에 익은 그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며 늑장도 부리고 그냥 가만가만 있고 싶다.

반찬 가득한 상보다는 몸에 부대끼지 않게 채소와 곡물이 적절히 섞인 한 끼가 그립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나를 반겨줄 편의점이 집 1층에 있어 24시간 언제든 마음 편히 방문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생기면 검색하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탁탁 바로 알 수 있게 익숙한 동네로 가고 싶다.


검색을 하다 보니 구미가 당기는 식당은 있지만 도보 15분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아...라는 생각과 함께 고민이 밀려온다.

여행 1,2일 차에는 고작 15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이런 식당이 있다니 운이 좋군 이라고 환호성 쳤을 텐데 말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본가인 대구였다.

막상 여행이 끝나니 그 이전의 기억들은 매트릭스 영화속 인물들이 뒤통수에 꽂혀 다운로드한듯 또렷하되 현실감은 없었다.


퇴사 기념 이런저런 복합적인 연유로 떠난 여행은 서툰 준비감에 아쉬움이 남았다.

한편, 언젠가 애틋하리만큼 이 순간을 그리워할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의 심해의 뻘이 일렁이고 물 먼지가 흩날렸다 가라앉았다.


일상으로 돌아온 이제 새로운 여행을 기획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언제 어떤 명목으로 이 정도 기간의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일상의 편안함과 여행의 설렘은 서로가 있기에 존재한다.

여행의 끝은 일상의 시작이고 일상의 끝은 새로운 여행이니 매일은 매일의 기쁨이 있다.

그 작은 순간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해 남긴 이 글에 나의 마음도 녹아나 있기를.

당신이 보내는 일상도 맞이할 여행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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