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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Apr 16. 2022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

퇴사 여행일지 1 - 떠나자 남해안으로

지난 몇 주간은 글을 쓰지 않았다.

코스피 나스닥이 오르던 말던 신경 쓰지 않았다.

딱히 땀나게 운동하지 않았다.

회사에는 필수 근무시간을 맞출 정도로 머물며 일했고 크게 새로운 업무를 맡으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최소 지난 1,2년 중 가장 게으른 나날을 보냄에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간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열심히 발품을 팔고 심지어 50만 원이라는 가계약금을 날려가며 이사를 했다.

이제 방에서도 아침인지 저녁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회사에는 퇴직원 서류를 제출하고 인수인계를 했다.

드디어 이직을 하게 되었다.


조금 더 정리가 되면 약 6년 차 경력 개발자의 이직기에 대해 정리해 볼 것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지난 몇 개월 몇 년을 얼마나 마음 졸이고 낙담하되 티 내지도 못하며 쓴웃음을 지어야 했나.

이직이 결정되고 퇴사 의사를 회사에 밝히자 사람들이 물어왔다.

‘그럼 어디 놀러 안 가요?'


내가 이런 고민을 할 날이 오긴 하는구나. 한창 이직 준비 중일 때 수십 번도 더 생각했다.

‘이것만 끝나 봐라. 바로 어디로든 뜬다’

그때는 ‘어디’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직장, 사는 이곳을 ‘뜬다’는 게 중요해서 막상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이제는 뜨기 위해 ‘어디’를 정해야 할 시점이 왔다.


그리고 남해안을 가기로 했다.

내 고향은 대구, 가족들은 여전히 대구에서 산다.

대학생 때부터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나서 어쩌면 십수 년을 ‘뜬’ 상태로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서울살이가 질리지 않는다. 재밌다는 것과 힘들지 않다는 다르다.

매달 나가는 월세며 다가오는 계약 만료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그럼에도 계속 변화하는 이 도시와 나를 지켜보는 재미에 서울 밖 국내 여행은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30년을 넘게 살면서 남해안 도시는 가보지 않았다.

막상 가려면 너무 멀다 싶어 언젠가 가겠지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참에 한 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통영으로 향했다.

당연히 인근까지 가는 기차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 걸. 2027년에 ktx가 들어온단다.

나같이 뚜벅이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이 또한 추억이 되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너무 순탄한 것은 기억에서 쉬이 사라진다.


서울 - 통영 고속버스 4시간 30분. 제기랄. 이것도 추억으로 쳐줄 수 있을까.

대구에 살던 어릴 적 서울에 사는 친척을 보러 가는 길, 혹여나 토할까 검은 봉지를 챙겨 무궁화호를 타고 4시간을 달리던 때보다 30분은 더 가야 한다.

GTX가 서울 근교 온갖 동네를 가로지르며 집값을 들썩이게 하는 중인데 여태껏 남해안 가는 기차가 없단 말인가. 그래도 ‘프리미엄’ 버스라는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에어비엔비로 숙소를 예약하고 통영과 거제를 행선지로 잡고 3박 4일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1-2일 정도 더 여행을 할 계획이지만 그 뒤는 일단 가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원하면 그곳에 더 있을 수도 다른 도시로 떠날 수도 있다.

아쉽게도 코로나 때문에 버스 노선들이 운행 중단된 곳이 많아 동선이 복잡해지긴 했다.

지금 나는 통영 2일 차에 글을 쓰고 있다. 3박 4일 후 어느 곳에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대책 없지만 이런 게 여행의 백미 아니겠는가.


숙소는 바다가 바로 앞인 곳으로 예약했다.

분지 촌년은 물이 보여야 내가 다른 곳을 왔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다.

급하게 여행 일정을 짜느라 인기 있는 좋은 숙소들을 놓친 게 아쉽지만 괜찮다.

이렇게 어설프고 급하지만 가볍게 훌쩍 떠나는 그 자체로의 낭만이 있다.

속옷과 양말만 넉넉히 하고 짐은 최소화했다.

밖에 다닐 때 메고 다닐 작은 가방도 챙길까 했다만 필요한 건 외투 주머니에 넣자라며 빼버렸다.

후로도 몇 개 옷가지들은 더 넣었다가 빼고 빼서 어깨는 한결 가뿐해졌다.

집 밖을 나서 나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어떤 우쭐함을 느꼈다.


‘소녀 떠납니다. 그간 열심히 구르고 일하며 사소서’


통영은 어딘가 시골스러운 느낌이 나는 항구도시였다. 터미널에 내려서도 제대로 내린건가 2-3초는 갸우뚱했다.

일단 숙소를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운전도 못하는데 카카오T가 잡히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완벽한 경상도 사투리와 출발지에서 10m만 더 나와있어 달라는 다정한 요청의 콜라보는 그 자체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녁은 통영 특산물과도 같은 다찌집으로 갔다. 본래 염두에 둔 곳이 있었지만 식당 안을 들어서서 이곳은 아니다 싶어 도로 나왔다.

온 골목이 다찌집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어떤 집으로 가야 잘 먹었다 소문이 나려나 열심히도 두리번거렸다.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아무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기댈 건 네이버 지도에 뜬 평점과 30여 년간 갈고닦아 온 내 안에 탑재된 맛집 레이더였다.

그렇게 들어간 곳에서 다찌집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후에 현지인에게서는 그 집도 그저 그런 정도라 들었지만 나는 통영은 해산물계의 비룡 집합소 같은 곳인건가 싶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역시 때론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 덕에 맞이하는 기쁨이 있고 그렇기에 내일은 언제나 살아볼 만하다.


온갖 해산물을 배 터지게 먹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번 택시기사님은 통영의 황금기를 읊어주셨다.

공무원 월급 15만원이던 시절 테이블 위에 100-200만 원을 턱 하니 올려놓고 노는 뱃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주셨다(대화라기보단 일방향에 가까운 옛날이야기 들려주는 할아버지 느낌이었다)


알딸딸한 그 와중에 홀로 여행하던 예전을 생각나게 했다.

인생에 사진으로 남는 몇 순간들, 그중에서도 20대의 몇 장중 하나는 미국에서 택시로 어디론가 이동하던 시절 이탈리안 택시 아저씨와의 대화였다.


‘Where are you from?’

‘From Korea’


이 말에 반색하며 자기 친척 중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사람이 있며 극한의 이탈리안 엑센트로 이야기를 들려주던 활기찬 아저씨의 목소리.

반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동 내내 모종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이게 이태리식 정인가 싶었다.


이젠 택시에서도 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 대부분 편히 쉬려 선택한 택시에서 너무 많은 말을 걸어오는 상황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도시가 주는 편안함에 취해서인지 끊임없이 말을 하는 택시기사님들이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통영시내에서 꽤 떨어져 있던 숙소는 밤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달빛마저 흐리고 가로등도 사치인 듯 어두운 밤.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온통 어두운 진짜 검은색 풍경을 창 밖 너머로 보고 있자니 살짝 무서움이 밀려와 시선을 거두었다.

위장도 혈중 알코올 농도도 한껏 채운 여행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통영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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