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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Sep 11. 2021

나의 이름은

밝고 맑은

재직 중인 회사 사내 연락망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면 수많은 동명이인이 뜬다. 1, 2페이지가 생기는 걸로 모자라 맨 마지막 페이지로 건너뛸 수 있는 버튼까지 동원돼야 할 정도이다. 성(姓)조차 가장 흔한 성이라 같은 부서 사람이 먼저 검색되는 기능이 없었다면 회의 초대자로 나를 검색할 때 꽤나 번거로운 일이 될 뻔하였다.


내가 특별한 존재이길 바랬다. 그래서 나를 대표하는 이름이 이토록 흔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 내 이름의 선택과정에 대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태어나고 고모부와 외할아버지께서 이름을 하나씩 권하셨고 그중 고모부가 주신 이름이 채택되었다. 외할아버지는 '나리'라는 이름을 주셨다고 했다. 지금 나의 이름보단 덜 흔하고 받침이 없어 외국인이 발음하기에도 좋다. 종종 '나리'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여러 번 상상도 했었다. 다행인지 닉네임을 쓸 일이 많은 요즘 세상에 '나리'를 사용할 일들이 자주 생겼다. 이쯤이면 외할아버지도 내게 이름을 주신 게 헛된 일은 아니라 여기지 않으실 것 같다.


이름이 흔한 것보다 더 맥이 빠지는 건 이름의 뜻을 인지하고부터다. 보통 여자아이 이름을 지을 땐 아름다운, 어진, 현명한, 슬기로운과 같은 뜻이 담긴 한자가 하나씩은 들어간다. 그런데 내 이름의 뜻은 밝고 맑다라는 뜻이다. 생리대 광고가 떠오르는 건 나뿐일까.


이름 짓는데 고작 2글자밖에 쓰지 않을 거면,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조합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비슷한 맥락의 글자에 쓰인 것도 아쉽고, 각 한자의 뜻이 임팩트도 없는 것 같다. 굳이 길게 뜻을 해석하면 빛나고 깨끗한 아이 정도 될까.


친구에게 내 이름 뜻을 얘기하면 '넌 정말 이름대로 컸구나'라고 말할 만큼 긍정적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내 이름처럼 살기가 쉽지 않다. 포기란 버튼이 있다면, 오락실에서 캐릭터 필살기를 쓰려 기를 모으듯 엄지와 검지를 모아 좌우로 갈겨버리던 때처럼 누르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다.


흐르는 물에 스포이드로 빨간 물간 몇 방울 떨어뜨린다고 물이 붉게 물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처 불순물이 분해되지도 않는 시점에 계속 오염물질이 들어오면, 탁하고 냄새나는 또 다른 오염원이 돼버리고 만다. 좀 적당히 해라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머리아픈 일들이 몰릴때면 내 마음속으로 흘러오는 폐수를 두 손으로 막기가 버겁다.


기껏 들어온 식당이 맘에 들지 않지만 '다음에 올게요' 말하고 나갈 용기가 없어 꾸역꾸역 음식을 주문해 먹고 있는 듯한 답답함. 심지어 음식도 그저 그래서 아까 나갈걸 후회만 하며 차오르는 위장에서 오는 부대낌. 그런 불쾌한 감정이 종일 지배할 때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는 생각에 침대 위에서 내려오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결국 침대 밖으로 나온다. 어떤 탁수도 맑아질 수 있다. 물은 확산과 미생물의 분해작용을 통해 정화된다. 글쓰기는 내 안의 미생물을 늘려가는 행위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의 불순물들을 조금씩 녹여내준다. 하루가 쉽지 않다 싶을 때는 몇 줄 문장을 쓰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달랜다.


이렇게 침전물을 거르고 자갈 사이를 흐르고 햇빛을 받으면 다시 맑아질 수 있다. 강 하류의 돌들은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둥글둥글하다. 고인 물은 결국은 썪는 법이고 돌을 깎아내는 마찰을 견디며 흘러야만 맑은 상태가 유지된다.


살면서 고난의 순간은 누구나 겪는다. 아무 생각 없이 해맑아 보이는 아이들도 그 때 겪는 불안정서가 있는데 그보다 긴 세월을 산 어른들이라면 자기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내게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생각한다. 부딪히고 아픈 순간들을 넘기며 더 넓은 곳으로 흘러가야지. 한낮의 태양보단 달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지난 날을 추억할 순간을 기다린다. 그때까지 언제나 빛나고 맑은 나로 남을 수 있도록. 그 날이 온다면 흔한 이름과는 다르게 고유하게 살아왔다 웃으며 얘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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